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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문화] ‘지옥훈련’, 되는 것과 안 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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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8-07-27 22:02:34 수정 : 2018-07-27 22:02: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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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학 때면 곳곳 단기 속성 광고/학습 원칙 어긋나는 목표 제시/세상에 아이 맞추려 하지 말고/아이가 필요한 경험하게 돕길 엘리베이터 안으로 외국인 선생님 한 분과 아이들이 밀려 들어온다. 중간중간 냉면, 돈가스 하는 말을 빼면 아이들은 대화를 영어로 이어간다. 제법 발음도 좋다. 하지만 자세히 들어보니 내용은 “점심 먹을래?”, “오케이”, “나도!” 정도로, 영어로 말을 하는 것 자체에 의의가 있는 듯하다. 아이들을 보면서 한 내담자가 생각났다. 공부, 음악, 미술 못하는 것이 없어 부모의 자랑이었지만 대학을 중도포기하고 현재는 ‘자아찾기’에만 매달려 있다. 왜 자신을 있는 그대로 봐주지 않느냐며 부모에 대한 원망이 크다. 부모는 최고 엘리트가 되는 길을 열어주려고 했다는데 정작 본인은 자신을 패배자라며 자책하고 있다. 소심했던 이 내담자는 방학 때마다 집 떠나 영어캠프 가는 것이 제일 싫었단다.

이 학원 이름을 전단에서 처음 봤다. 타는 듯한 날씨 때문인지 커다란 빨간 불꽃까지 곁들여 한 달간의 ‘지옥훈련’ 어쩌고 하던 광고문구가 인상적이었다. 방학 때면 이렇게 ‘극기’ 혹은 ‘지옥훈련’으로 무엇인가를 단기속성으로 마스터하게 해준다는 광고를 본다. 허약한 아이 체력 강화, 심약한 아이 대범하게 만드는 해병대식 극기훈련, ‘사회성 훈련으로 자신감 쑥쑥 캠프’까지. 체력, 심성, 심지어 인간성까지 단기속성으로 바꿔 준다는 여름방학 ‘지옥훈련’ 프로그램은 종류도 참 다양하다.

안명희 서강대 교수·심리학
이러한 군대식 혹은 지옥훈련은 본인이 원해서 하는 자기주도학습이 아니라 정해진 스케줄대로, 할 수 있을 만큼이 아닌 극단치에 도전해, 단기간에 반드시 결과를 보여줘야 한다는 가정이 깔려 있다. 놀고만 싶을 아이들이 자발적으로 등록할 리 없고, 개인차를 고려하기 어려우니 낙오자가 나오기 쉽다. 성취를 높이려다 오히려 학습동기만 떨어져 공부에 취미를 아예 잃는 경우도 봤다.

대부분 단기속성으로 효과를 보거나 바꿀 수 없는 것을 목표로 하는 것도 문제다. 언어는 학습이 아니라 꾸준히 습득해야 하고, 체력도 조금씩 단련해야 효과를 본다. 체험으로나 과학으로 이미 알려진 사실이다. 속성 다이어트는 ‘요요’를 불러오고, 막판 밤새우기로 평소에 밀린 공부를 대신하긴 역부족 아니던가. 뭐든 매일매일 꾸준히 해야 한다고 아이들에게 평소 가르치는 것과도 완전배치된다. 이런 식의 단기속성 지옥훈련학원 혹은 탈바꿈프로젝트는 어른을 향해서도 그 공세가 맹렬하다. ‘3주 속성 체지방다이어트로 비키니 몸매 만들기’, ‘한 달 안에 동안 만들기’, ‘10곡으로 평생 음치탈출’ 등의 광고문구가 길거리에 넘쳐난다.

무엇보다 우려되는 것은 의지나 학습으로 변화를 꾀할 대상이 아닌 것을 포함하는 경우다. 지능은 물론 몸무게, 음악성, 모두 타고난 체질, 적성의 영향을 받는다. 무조건 하면 된다는 공식 자체가 성립이 안 된다. 특히 사람의 마음은 천성이 많이 좌우하는데, 기질적 차이를 무시하고 부끄럼 타는 내성적인 아이를 여름방학 동안 외향적 성격으로 확 바꿔 놓을 수 있을까. 왜 꼭 그렇게 바꿔 놓아야 하는지도 생각해 볼 문제다. 경쟁에서 밀리고 자기 몫도 제대로 찾아 먹지 못할까 불안해하지 말고 아이의 감성을 들여다보는 인내심부터 키워야 하는 것 아닌지 모르겠다. 아이를 세상에 맞추려 하지 말고 아이에게 필요한 세상을 경험하게 해 주어야 하는데. 묵묵히 꽃을 피울 때까지 기다려 주어야 하는데. 만개한 꽃잎의 색깔이 남들과 달라도 잘못된 것이 아닌, 그냥 다름으로 수용해야 하는데 부모는, 우리는 그걸 어려워하는 것 아닌지.

한 요리프로그램에서 10분 만에 쉽게 할 수 있으면서도 깊은 맛을 내는 요리를 가르쳐 줬다. 10분 만에 뚝딱 했으면 그 정도의 맛만 기대해야지 어떻게 깊은 맛까지? 하고 반신반의했는데 정말 만들기도 간편하고 보기도 좋고, 맛도 좋았다. 그런데 숨은 비법이 있었다. 보통 그 요리에 넣지 않는 외국 향신료가 하나 추가됐다. 그래서 정작 이걸 무슨 음식이라고 불러야 하는지 헷갈렸다. 방학 동안 친구 사귀는 기술을 익히고, 영어단어가 술술 나오게 됐고, 지옥훈련으로 성적도 올랐었다는 내 내담자는 “내가 누구인지 모르겠어요” 하고 울었었다.

안명희 서강대 교수·심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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