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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접공서 진보 간판스타로…‘언어의 연금술사’ 불리기도

입력 : 2018-07-23 19:04:34 수정 : 2018-07-23 22:16: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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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회찬은 누구 / 대학생 시절 노동운동 뛰어들어 / 진보정치 출발 민노당 창당 주도 / 2004년 첫 배지 ‘판갈이론’ 주장 / ‘떡값 검사’ 공개로 부침 겪기도
62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한 정의당 노회찬 원내대표가 노동운동에 뛰어든 것은 1980년이다. 군 전역 후 뒤늦게 고려대 정치외교학과(1979년)에 입학했지만, 그가 목도한 것은 5·18 광주민주화운동에 대한 신군부의 탄압이었다. 이에 충격을 받은 그는 노동운동에 뛰어들었고, 훗날 진보정치의 출발점이 된 민주노동당(2000년) 창당을 주도했다. 그는 그렇게 진보정치 37년의 역사 현장을 지켰다.

노 원내대표가 노동운동에 뛰어들면서 선택한 직업은 용접공이었다. 대학생 시절인 1982년 영등포 청소년 직업학교에서 기능사 2급을 따면서 용접공 노회찬의 삶이 시작됐다. 1987년 노동자의 정치세력화를 내세운 인천지역민주노동자연맹(인민노련) 구성을 주도했다는 이유로 수배자 신분이 됐다. 1989년 검거돼 2년6개월 만기 복역했다.

노 원내대표는 민노당 전신인 국민승리21에 합류하면서 진보정당 출범의 토대를 마련했다. 그가 처음 국회의원 배지를 단 것은 2004년 총선이었다. 당시 “50년 쓰던 고기판에 삼겹살을 구우면 까매진다”며 ‘판갈이론’을 주장하는 등 촌철살인의 발언이 주목받아 ‘노회찬 어록’이 탄생했다. 그는 적절한 상황 속에 빗대어 표현하는 특유의 화법으로 ‘언어유희왕’, ‘언어의 연금술사’라는 별명이 따라 붙기도 했다.

노 원내대표가 정치적으로 한 차례 부침을 겪었던 것은 ‘삼성의 X파일’ 사건에 등장하는 ‘떡값 검사’ 실명공개 때문이었다. 그는 2005년 국정감사에 앞서 보도자료를 통해 공개 배포했다는 혐의(통신비밀보호법 위반)로 유죄 선고를 받아 19대 국회의원 당선 9개월 만인 2012년 의원직을 상실했다.

‘진보의 아이콘’으로 불리던 노 원내대표는 ‘드루킹’ 김동원씨로부터 불법 정치자금을 수수한 혐의가 불거지면서 새로운 정치적 고비를 맞았다. 그는 “어떤 불법적인 자금도 받지 않았다”고 강조했지만, 이날 금전을 받은 사실을 인정하는 유서를 남긴 것으로 전해졌다.

고인과 친분이 두터운 정치인으로는 경기고 동창인 더불어민주당 이종걸 의원이 있다. 둘은 고등학교 시절 유신반대 유인물을 교내에 뿌리며 사회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공통분모가 있다. 당시 동창 중에는 황교안 전 국무총리가 있었지만, 노 원내대표는 훗날 “황 총리와 고교 동창인 점은 죄송스럽게 생각한다”고 말할 정도로 관계가 멀다. ‘용접공 친구’도 있다. 민주당 홍영표 원내대표다. 부인들 역시 노동운동을 함께 한 동지이자 ‘절친’으로 알려졌다.

김달중 기자 dal@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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