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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호의 나마스테!] “잊혀진 우리 말로 쓴 恨 서린 민초들의 삶 교정보며 많이 울어”

입력 : 2018-07-23 21:01:38 수정 : 2018-07-23 21:18: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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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년 만에 소설 ‘국수’ 완간한 김성동 “교정을 보면서 혼자 많이 울었어. 바로 오늘의 현실에 있는 내가 어디서 왔냐 이거지. 오늘날 요 모양 요 꼴이 된 이유가 뭐냐, 이 말이지. 그게 역사인데, 결국은 아버지 할아버지들이 왜놈 양놈에 짓밟히면서 내 개인사도 무너지고 나로서는 할 수 없이 마지못해 문학으로 온 거여. 그거밖에 길이 없으니까. 와서 봤더니 이게 또 엄청난 동네야, 불교적 깨달음 못지않은 세계란 말이여. 더 기가 막힌 것은 어지간한 일은 10년만 하면 기술자가 되는데 문학은 내가 40년 넘어 반세기 가까이 해오고 있는데도 매번 처음 하는 거 같다는 거지.”

소설가 김성동(71)이 격변하는 조선조 말기의 이야기를 담은 대하 장편소설 ‘국수’(전6권·솔·사진)를 완간했다. 1991년 일간지에 연재하기 시작한 이래 27년 만이다. 임오군변(1882)에서 시작해 동학농민운동(1894) 전야까지 충청도 내포지방(예산 덕산 보령)을 배경으로 양반과 노비, 선승과 동학접주, 빼어난 기생과 미천한 계급의 인물들까지 다양하게 등장시켜 그 시대의 삶을 구체적으로 풀어냈다.

김성동은 당대 내포지방의 언어를 충실하게 살려내, 아름다운 우리말을 발굴하고 복원하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 이 대하소설 마지막 6권은 소설에서 쓰인 ‘낯선’ 우리말을 풀이하는 사전으로 꾸려졌다. 갈수록 왜소해지는 문학판에 굵직한 사건을 만들어낸 그를 지난주 기자간담회가 끝난 후 따로 만났다.

27년 만에 조선조 말기 격동의 시기를 풍성한 우리말로 세밀한 풍속사와 문화사로 그려낸 소설가 김성동. 그는 “당대 사람들이 과연 어떤 내용의 밥을 먹고 누구를 만나서 왜 싸우다 죽었는지 가능하면 그 당시 언어로 표현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국수(國手)’란 본디 각 분야의 최고를 일컫는 말인데 의미가 축소돼 바둑이나 장기의 최고수를 일컫는 단어로 굳어진 표현이다. 김성동은 이 소설에서 바둑 이야기는 상징적인 차원으로 수용하고 지난 시대의 문화와 풍속사를 당대의 언어로 세밀하게 묘사하는 이 시대 문학의 ‘국수’로 나선 셈이다. 그가 이 소설을 집필하게 된 건 단지 이런 이유 때문은 아니다.

부친 김봉한(1917~1950)은 일제 때 독립운동을 하다 해방공간에서 서북청년단에 체포돼 6·25전쟁 국면에서 같이 수감됐던 이들과 함께 집단 처형돼 시신도 찾을 수 없었다. 올 3월 96세로 작고한 모친도 고문과 수감 생활을 되풀이해야 하던 숙명이었다. 아버지가 처형될 때 네 살이었던 김성동은 할아버지 아래서 구술 역사를 들으며 성장했고, 서슬퍼런 연좌제 아래 제대로 사람 행세를 할 수 없다는 절망에 고등학교를 중퇴하고 입산했다가 결국 문학의 길로 들어섰다. 문학은 그나마 그에게 ‘면죄부’를 주었다.

“1980년대 초에 아버지가 처형당했다는 대덕군 산내면 낭월리로 가서 집을 짓고 살았어. 기가 막힌 게, 나는 어머니를 속이고 어머니는 나를 속인 거야. 나는 어머니가 설마 아버지가 돌아가신 현장을 알지 못할 거라고 생각한 건데 어머니가 모를 리 없었지. 나는 아버지 혼령을 천도하려고 매일 아침 목탁을 치고 어머니는 어머니대로 서로 모르게 한 거지. 서로가 모르는 줄 알고 속인 건데, 그 피어린 현대사는 꿈에서라도 누가 들을까봐 한 식구라도 절대 이야기를 안 했어. 어머니도 잡혀가 고문당한 걸 이야기 안 하고 지병이 도졌다는 식으로 말을 하곤 했어. 기가 막힌 이야기지.”

김성동은 1978년 승려 생활을 바탕으로 쓴 ‘만다라’가 성공한 이래 짧은 시간 각광을 받고 한서린 가족사를 써서 잠시 호평도 받았지만, 이후로는 줄곧 고난의 세월이었다. 1990년대 접어들어 피어린 가족사를 직접 쓰는 대신 그들이 투쟁할 수밖에 없었던 현실을 배태한 뿌리를 톺아보기 위한 시도로 시작한 소설이 바로 국수였다.

“아버지의 뿌리로 올라간 거지. 150년 전이나 지금이나 다른 게 하나도 없었어. 갑오봉기 때 윗동네 전라도 일원에서는 동학 전야로 들끓고 있었는데 그 이웃 동네 호서 충청도에서는 무슨 생각으로 어떻게 움직였을까. 역사에서는 빠져버렸지만 갑오년 동학 때 충청도에서 굉장히 중요한 구실을 했거든. 마지막 조선왕조 노을진 그 시절의 삶을 전통적 어법으로 제대로 보여주고 싶었던 거여. 현대어로 쓰면 의미가 없다고 봤지. 다른 이들은 안 하는지 못 하는 건지 모르겠지만 언어는 시대와 계급과 장소의 산물이여. 벽초 홍명희 ‘임꺽정’이 아쉬운 건 지배자나 피지배자의 언어가 똑같다는 거야.”

실제로 ‘국수’를 접해 보면 무수히 나오는 옛 언어들의 주석을 하단에서 챙겨보느라 독서 속도가 느려질 수밖에 없다. 어느 순간에는 이야기의 흐름은 차치하고라도 그 시절 사람들의 풍속과 심성이 자연스럽게 체화되는 걸 느끼게 된다. 이 소설을 추동하고 펴낸 평론가 임우기의 “문장 하나하나를 만든 게 아니라 조선 문장을 초혼(招魂)한 것 같다”는 말에 고개가 끄덕거려지는 배경이다. 사라지거나 변질된 수많은 우리말 중 ‘안해’라는 단어를 김성동은 ‘안에서 뜨는 해’라는 말로 ‘해방 8년사’가 끝나는 1953년 7월 27일까지 쓰였던 말이라고 풀이했다. 국어사전에는 ’아내의 옛말‘이거나 ’아내의 북한말‘이라고 표기돼 있다.

“답답한 게 페미니스트들이 이 말의 의미를 몰라. 여자가 남자의 종속된 개념이 아니라 내부에서 동등한 태양으로 뜨는 존재라는 거지. 우리 겨레의 특성이 그거야. 내 할아버지도 존대말을 쓰면서 할머니를 굉장히 인격적으로 대했어. 그게 바로 ‘고루살이’라는 거야. 서양 특정 종교의 ‘공동체’ 개념과는 달라. 아버지가 어머니에게 보냈던 편지를 지금도 가지고 있는데 거기 보면 ‘안해’라는 말이 나와. 북한에서 만든 말이 아니고 원래 조선말이었는데 그걸 쓰고 안 쓰는 그런 차이가 생긴 거지. 여기는 모든 말이 왜화, 양화돼버렸어.”

아버지 어머니가 ‘혁명’에 투신할 수밖에 없었던 ‘모순’의 뿌리를 ‘국수’를 통해 펼쳐낸 만큼 김성동은 이제 아버지에게 어느 정도 당당해졌을까. 할아버지가 항상 말하던 아버지라는 뛰어난 존재의 무게에 늘 ‘쫄아 있었다’는 그는 “아버지의 정신이 옳은 것이었다면 나도 그런 삶을 살아야 하는데 나에게 허여된 붓을 통해 사는 수밖에 없다”면서 “이제 아버지 어머니의 목소리로 그분들의 시대를 소설로 써내고 싶다”고 말했다.

김성동은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발표할 지면을 찾지 못해 방황하다가 계간 ‘황해문화’(2016년 겨울호)에 ‘고추잠자리’라는 중편으로 어렵사리 발표했지만, 산으로 들어간 아버지들을 위해 주먹밥을 싸다가 체포돼 ‘반역행위’로 투옥과 고문의 연속된 삶을 살아야 했던 어머니나 남에서도 북에서도 지워진 아버지 같은 존재들을 제대로 부각시키는 게 남은 목표다. 지난봄 어머니를 떠나보낸 늙은 아들의 말.

“어린시절 어머니는 늘 옆에 없었습니다. 어디를 가셨을까, 왜 잠깐 나타났다 사라질까, 항상 의문이었습니다. 처음에는 몰랐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형무소에 있었던 겁니다. 잠깐 왔다가는 또 잡혀가고…. 내가 증언해야겠구나 싶었지요. 어머니 개인 이야기가 아니라 피나는 현대사였습니다.”

글·사진=조용호 문학전문기자 jhoy@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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