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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병주의역사의창] 여름의 피서지, 한양의 계곡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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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8-07-20 21:52:22 수정 : 2018-07-20 21:5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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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운동·백사실·무계동 등 대표적 / 원형은 훼손됐지만 풍류는 여전 시원한 계곡물에 발을 담그고 청량한 산바람을 맞으며 무더위를 날려 보내고 싶은 계절이다. 조선시대 한양은 낙산, 인왕산, 남산, 북악산의 네 곳 산으로 둘러싸인 지역이어서 도심 곳곳에 계곡이 발달했다. 북악산 자락의 백운동(白雲洞)과 백사실(白沙室) 계곡, 인왕산 자락의 무계동(武溪洞)과 수성동(水聲洞) 계곡이 대표적인 곳이었다. 무계동은 세종의 셋째 아들인 안평대군(1418~1453)이 무계정사(武溪精舍)를 짓고 살았던 곳으로, ‘몽유도원도(夢遊桃園圖)’의 배경이 되는 공간이기도 하다. 1447년(세종 29) 4월, 꿈에서 무릉도원의 모습을 본 안평대군은 안견에게 꿈 이야기를 하면서 그림을 그려줄 것을 부탁했는데, 이 작품이 바로 ‘몽유도원도’이다.

그로부터 3년 후, 안평대군은 무계동지역을 찾았다가, “그윽한 물과 언덕의 자태가 (꿈에서 본) 그곳과 거의 비슷하였다” 하여 이곳에 자신이 거처할 집을 짓고 ‘무계정사’라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안평대군이 무릉도원으로 생각할 정도였으니, 무계동은 조선시대 최고의 절경이었다고 할 수 있다. 현재 부암동 주민센터 바로 옆 골목으로 조금 들어가면 만날 수 있는 무계동 지역은 ‘武溪洞’ 세 글자가 새겨진 바위와 건물 일부가 남아 있는 ‘무계정사’의 모습에서 옛 풍광을 조금이라도 느낄 수가 있다.
신병주 건국대 교수·사학

최근 서울의 명소로 주목을 받고 있는 ‘서촌’의 통인시장에서 인왕산 쪽으로 올라가다 보면, ‘물소리가 유명한 계곡’이라는 뜻의 수성동 계곡을 만날 수 있다. 수성동은 안평대군의 별장인 비해당(匪懈堂)이 있었던 곳인데, 시·그림·서예에 조예가 깊었던 안평대군은 현재의 부암동 쪽에 무계정사를 짓고 살면서, 비해당에 와서 책을 읽고 당대의 학자들과 교류했다. 비해당은 조선 초기 문화센터로서 기능을 한 셈인데, 성삼문·박팽년·서거정 등과 안평대군이 이곳에서 주고받은 시들이 기록으로 남아 있다.

19세기의 학자 유본예가 쓴 ‘한경지력(漢京識略)’의 ‘명승(名勝)’ 항목에는 수성동을 소개하면서, “골짜기가 깊고 그윽해서, 물이 맑고 바위 좋은 경치가 있어서 더울 때 소풍하기에 제일 좋다”고 하여, 한여름의 피서지로 각광을 받았음을 알 수가 있다. 수성동 계곡은 특히 진경산수화의 대가인 겸재 정선이 한양의 모습을 그린 그림 중에 ‘수성동’이 알려지면서 더욱 주목받는 명소가 되고 있다. 최근까지 이곳에는 옥인아파트가 있었는데, 2011년 아파트 9개 동이 철거되면서 계곡이 복원됐다. 복원 과정에서 ‘수성동’의 그림에 그려져 있는 다리인 기린교(麒麟橋)가 발견돼 큰 화제가 되기도 했다.

북악산 뒷자락에 북한산을 배경으로 조성된 대표적인 계곡은 백사실 계곡이다. 백사의 ‘백사(白沙)’는 조선중기의 학자 이항복(李恒福·1556~1618)의 호로서, 이곳이 그의 별장임을 짐작하게 한다. 1611년 1월 꿈속에서 이곳을 찾았던 이항복은 계곡과 흰 모래가 매우 인상이 깊어, ‘백사’라는 호를 쓰게 됐다. 이항복은 그날의 꿈 이야기를 기록으로 남기고 있는데, “물길은 넓이가 수백 보쯤 되고 깊이는 사람의 어깨에 차는데, 깨끗한 모래가 밑바닥에 쫙 깔려 있어 맑기가 마치 능화경(菱花鏡)과도 같아서 오가는 물고기들이 마치 공중에서 노니는 것 같았다”고 표현하고 있다.

비교적 높은 지역임에도 불구하고 맑은 계곡물이 흐르고 있는 이곳 입구의 큰 바위에는 ‘백석동천(白石洞天)’이라는 네 글자를 새겨서 이곳이 별세계임을 표현하고 있는 것도 눈에 띈다. 백사실은 명승 유적과 함께 자연생태가 어우러진 지역으로 맑은 계곡물에 도롱뇽, 버들치, 가재 등이 서식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현재 백사실의 중심부에는 이항복의 기록에 나오는 정자 터와 연못의 흔적이 남아 있어 기록의 힘을 느끼게 한다.

조선시대 사람들에게 한여름의 피서지로 사랑받았던 주요 계곡 대부분은 물길이 복개가 되고, 주변에 집들이 들어서면서 원형의 모습을 거의 찾아볼 수는 없다. 그러나 기록과 그림에 나타난 장면을 기억하고 이곳을 찾으면 옛 풍경을 아득하게 접할 수 있다. 당시인들의 풍류와 함께 한여름의 더위마저 날려 버릴 수 있는 점도 큰 장점이다.

신병주 건국대 교수·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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