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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인사이드] 엄마·아빠 대신 육아… ‘할마·할빠’가 뜬다

입력 : 2018-07-21 10:14:20 수정 : 2018-07-21 13:4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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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아주고 이유식 만드는 법 익히니… “황혼육아 걱정없어요” / 대 걸러 봐주는 조부모 ‘격대 육아’ / 부모들이 믿고 맡길 수 있어 선호 / 맞벌이 가구의 절반 이상이 해당 / 새로나온 육아용품 사용방법부터 / 대화법·마사지 등 프로그램 다양 / 긍정적 애착관계 형성에 큰 도움 / 육아로인한 자녀와 갈등도 해소
“염소 소리는 ‘할머니 소리’라고 생각하면 돼요. 목을 떨면서 성대를 울려보세요. 음매∼ 이리 오너라∼.” “음매∼ 이리 오너라∼.”

지난 11일 서울 강서구 염창동 강서평생학습관. 강사의 말이 끝나자 강의실을 메운 참석자들이 염소 소리를 흉내 냈다. 이날은 강서구가 손주를 키우는 이들을 위해 마련한 ‘좋은 조부모교실’의 첫 수업 날로, 놀이법과 동화구연 등을 배우는 시간이 마련됐다. 강사가 ‘동화책을 재미있게 읽어주는 법’이라며 동물 소리 발성법을 알려주자 모두 서툴지만 열심히 따라 했다. 처음에는 쑥스러워하는 수강생도 있었지만 시간이 지나자 목소리에 점점 자신감이 붙었다.

수업을 듣는 사람은 대부분 여성이었으나 군데군데 ‘할아버지 학생’도 눈에 띄었다. 다들 중년층과 머리가 희끗희끗한 노년층이었지만 수업 열기는 여느 대학 강의실 못지않게 뜨거웠다. “손주를 키울 때 자녀가 ‘그렇게 하면 안 된다’고 지적할 때가 있죠? 예전에는 ‘공감 대화법’을 안 써서 그래요. 아이들에게 ‘이거 해봐’가 아니라 ‘이렇게 해볼까?’라고 해야 해요.” 강사의 말이 끝날 때마다 많은 이들이 고개를 끄덕였고, 말을 놓칠세라 교재에 필기하는 사람도 있었다.
지난 11일 서울 강서구 강서평생학습관에서 열린 ‘좋은 조부모교실’에 참석한 조부모들이 강사로부터 동요와 율동을 배우고 있다.
2011년부터 진행된 강서구의 조부모교실은 구의 인기 교육 프로그램이다. 지난해까지는 1년에 1회만 진행했지만 수요가 많아 올해부터는 1년에 2회로 늘렸다. 이번 상반기 교육은 100명의 참가자를 모집했는데, 금세 정원이 꽉 찼을 정도로 인기다. 지난 18일에는 정신과 전문의가 육아 스트레스 대처법을 알려줬고, 오는 25일에는 손주와 친해지는 법, 교육법 등을 가르친다.

수업을 들은 사람들의 표정은 밝았다. 일곱 살, 한 살 손주를 키우는 김용숙(68·여)씨는 “우리 세대가 아이를 키우던 때하고는 다르니 어려운 점이 있었는데 수업이 많은 도움이 됐다”고 말했다. 성모(60)씨는 남편과 함께 강의실을 찾았다. 성씨는 “우리 나이에는 육아 관련 정보를 접하거나 찾는 것이 어렵다. 어떻게 하는 것이 아이에게 도움이 되는지 몰라 답답한 마음이 있었다”며 “수업을 들으니 자신감이 생긴다. 손주를 더 잘 봐줄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했다.

최근 맞벌이 부부 증가 등으로 손주를 돌보는 ‘할빠(할아버지+아빠) 할마(할머니+엄마)’가 늘어나고 있다. 과거 육아수업은 주로 엄마 아빠 위주로 진행됐지만, 최근에는 ‘요즘 육아법’을 배우려는 할빠 할마가 증가하면서 손주 육아 수업이 인기를 끌고 있다.

◆늘어나는 황혼육아… 아이에게도 긍정적

20일 육아정책연구소의 ‘맞벌이 가구의 가정 내 보육 실태 및 정책 과제’에 따르면 2016년 기준 맞벌이 가구의 미취학 자녀 양육자(복수응답) 중 조부모와 친·인척은 63.6%로, 어린이집 이용률(61.8%)보다 높았다. 2012년 보건복지부의 조사에서도 맞벌이 가구의 절반 이상이 자신의 부모에게 자녀를 맡기는 것으로 나타났다. 현재 한국 사회에서는 조부모가 육아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는 셈이다.
이같이 대를 걸러 육아하는 조부모의 ‘격대 육아’는 조부모가 아이에게 깊은 사랑을 줄 수 있고, 부모는 자녀를 믿고 맡길 수 있다는 점에서 많은 이들이 선호한다. 직장에서 일하는 동안 시부모님에게 세 살 난 아이를 맡기고 있는 이모(36·여)씨는 “전문적인 베이비시터도 좋지만, 아무래도 아이를 가장 사랑하는 사람에게 맡기는 것이 아이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줄 것이라 생각한다. 다른 곳에 맡기는 것보다 안심이 된다”며 “맞벌이 부부라면 누구나 기관이나 베이비시터보다 조부모에게 아이를 맡기는 것을 선호할 것”이라고 말했다.

전문가들 역시 조부모 육아가 아이 입장에서는 무한 신뢰와 사랑을 받을 수 있어 자존감이 커지고 정서적으로 안정되는 장점이 있다고 말한다. 부모와 조부모 세대의 문화를 모두 경험하면서 인성 발달에도 도움이 된다는 것이다. 미국 노스캐롤라이나대학 글렌 H 엘더 교수팀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조부모와 함께 자란 아이들은 상대적으로 학교 성적이 우수하고 성인이 된 후에도 성취감이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미국 브리검영대학의 연구 결과에서도 조부모와 친밀하게 느끼는 아이들은 친사회행동(보상을 바라지 않고 사회를 이롭게 하기 위해 하는 행동) 성향이 높았다. 조부모 입장에서는 아이를 키우며 보람을 느낄 수 있는 것은 물론 외로움을 해소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요즘 육아 배워야’… 손주 육아 수업 인기

이처럼 황혼육아가 늘면서 서울의 많은 자치구가 할아버지 할머니를 대상으로 손주와 놀아주는 법, 이유식 만드는 법 등을 알려주고 있다. 예전에는 ‘정석’으로 여겨졌던 육아법이 변하고, 최신 육아용품이 많아지면서 ‘육아도 배워야 한다’는 인식이 퍼지고 있기 때문이다.

광진구는 2016년부터 ‘손주돌봄 육아교실’을 운영 중이다. 지난 4월 열린 강의에서는 신생아 돌보는 법과 긍정적인 애착관계를 형성할 수 있는 손주와의 대화법, 가정에서의 안전사고 대비 및 응급처치법, 성장마사지 교육 등이 진행됐다. 광진구는 오는 10월에 강연을 추진할 예정이다. 강동구는 올해 4월과 6월에 이어 9월과 11월에 3회차씩 교육을 진행한다. 교육 내용은 △신생아 관리 △연령별 이유식 조리 및 영양교육 △예방접종 일정 관리법 및 구강관리 등이다. 양천구도 손주의 성장단계에 맞는 이유식과 건강 간식에 대해 알려주고 요리 실습까지 할 수 있는 ‘황혼육아를 위한 요리 체험 교실’을 진행한다.

서초구는 조부모 교육을 활성화하기 위해 육아 수업을 듣고 손주를 돌보는 조부모에게 월 최대 24만원의 수당을 지급하는 ‘손주 돌보미’ 제도를 운용하고 있다. 24개월 이하 손주를 키우는 조부모들은 영유아 돌보는 법과 소통법 등을 25시간에 걸쳐 교육받는다.
이 같은 교육의 만족도는 높다. 강서구가 올해 수업을 들은 이들을 대상으로 설문조사한 결과 응답자 88명 중 87명이 ‘만족한다’고 답했다. 86명은 교육을 받은 후 육아와 양육에 자신감이 상승했다고 응답했다. 이 중 17명은 이전에 수업을 듣고 또다시 찾은 이들이었다.

◆‘부모 vs 조부모’ 육아 갈등도 줄어

손주 육아 교육 프로그램은 조부모와 손주뿐 아니라, 자녀와의 관계에도 도움이 된다. 평소 육아법을 두고 친정 어머니와 다투는 일이 잦았던 워킹맘 김모(35·여)씨는 지난해 어머니에게 구에서 진행하는 육아 수업을 권했다. 김씨는 “어머니가 ‘어릴 때 먹는 것은 다 키로 간다’며 간식을 아이가 달라는 대로 다 주곤 했다”며 “화학물질 노출이 걱정돼 아이 옷은 전용 세제로 따로 빨았는데, 어머니는 ‘예전에는 그렇게 안 해도 잘 컸다’면서 내가 유난 떤다고 할 때가 많았다”고 말했다.

김씨의 어머니는 처음에는 ‘자녀를 3명이나 키웠는데 무슨 수업을 듣냐’며 탐탁지 않아 했지만, 영유아 식습관 개선 수업 등을 듣고 생각이 많이 바뀌었다. ‘더 배워야 할 것 같다’며 육아 서적을 찾아보기도 한다. 김씨는 “이전에는 내가 육아에 관해 이야기하면 어머니가 참견이라고 생각해 다툼이 생겼지만 전문가 수업은 인식 변화에 효과적이었다”며 “이제는 육아법에 대해 전보다 서로 부담 없이 이야기 할 수 있어서 나도 어머니를 이해하게 됐다. 아이를 잘 봐주시게 된 점도 좋지만 나와의 관계가 좋아진 점이 가장 만족스럽다”고 전했다.

조부모 교육을 진행하는 한 구 관계자는 “자녀를 길러봤어도 손주를 기르는 것은 또 다른 경험”이라며 “육아 교육은 양육에 대한 자신감을 주는 것은 물론 육아로 인한 자녀와의 세대 갈등을 해소할 수 있다. 필요성을 공감하는 이들이 많아 모든 자치구에서 계속 확대되는 추세”라고 말했다.

글·사진=김유나 기자 yoo@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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