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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의역사] (7월16∼22일) 나치 정통파의 히틀러 암살미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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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8-07-15 21:05:08 수정 : 2018-07-15 17:10: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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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4년 7월20일 실패로 끝난 히틀러 암살 계획인 ‘발키리 작전’은 원래 그런 것과는 거리가 먼 예비군 동원 계획 같은 것이었다.

바로 예비군 참모인 클라우스 폰 슈타우펜베르크 대령이 주도한 것이다. 동부지방 라슈텐부르크의 히틀러 작전지휘소인 ‘볼프샨체’에서 히틀러가 회의를 할 때 슈타우펜베르크가 시한폭탄을 터뜨리면 다른 모의자들이 나치 핵심들을 체포하려는 계획이었다.

슈타우펜베르크도 원래 히틀러 암살과는 거리가 먼 인물이었다. 그는 프로이센의 귀족 가문 출신으로 곧잘 ‘대령’이라는 계급보다 ‘백작’이라는 작위로 불리었다. 명예를 중시하는 전형적인 군인으로서 한때는 히틀러를 ‘독일을 구할 진정한 지도자’로 존경하기도 했다. 그런 점에서 좌파들이 시도했던 종전의 암살모의와도 달랐다. 그는 바로 전해 북아프리카 전선에서 부상으로 왼쪽 눈과 오른손을 잃었고, 왼손 손가락 두 개도 없어진 상태였다. 그래도 의연하게 전쟁에 몸을 내맡겼던 이 ‘백작’도 나치의 만행에는 의연할 수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의 치밀한 계획도 현장의 사소한 우연으로 히틀러를 죽이지 못했다. 히틀러를 노린 마지막 암살 미수였던 발키리 작전은 그 시점도 눈길을 끈다. 그때는 이미 연합군이 노르망디 상륙작전에 성공해 독일을 향해 진격하던 시점이자 히틀러가 자살(1945년 4월30일)하기 불과 9개월 전이었다. 그러다 보니 ‘어차피 자살로 마감할 인생…차라리 그때 죽었더라면 얼마나 많은 인명이 구제됐을까’ 하는 탄식이 절로 나오게 됐다.

물론 그것은 아직도 승리하리라는 광신에 사로잡힌 히틀러에게는 걸맞지 않는 이야기였다. 이 독재자는 마지막 광기를 부리듯 7000명을 체포해 약 5000명을 살해한 것으로 알려졌다. 2차 대전을 통해 가장 전설적인 독일군 장군이었던 에르빈 롬멜도 연루 의혹을 받아 자살해야 했다. 이 사건은 나치 복장에 가려진 독일 군인들의 또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양평(언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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