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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조는 없는 데, 정조는 있는 것…조선 임금의 태몽에 깃든 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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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8-07-15 11:00:00 수정 : 2018-07-15 08:4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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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일에 탄생할 것이니 귀하기가 말할 수 없다.”

점쟁이의 이런 예언을 받은 아이가 태어나던 날, 방에는 붉은 빛이 비치고 기이한 향기가 가득했다. 외할머니는 아이의 태몽을 꾸었는데 아이 엄마 곁에 붉은 용이 자리잡고 있었고, 병풍에는, 귀한 아들이 1000년을 누릴 복을 가지고 태어난다, 는 글귀가 쓰여 있었다. 태어나고 보니 생김새가 범상치 않았다. 오른쪽 넓적다리에 사마귀가 무수히 있어 중국 한나라 고조 유방과 같은 제왕의 상이라 일컫는 이도 있었다.

이 신기한 이야기의 주인공은 조선의 16대 임금 인조(1595~1649)다. 임금이나 그에 맞먹는 인물의 탄생 신화 혹은 설화와 거의 비슷한 요소와 구조를 가진 이 이야기가 인조를 신성화하기 위해 만들어졌다는 걸 알아차리기는 어렵지 않다.

국립고궁박물관에서 진행 중인 특별전 ‘조선왕실 아기씨의 탄생’에 출품된 정조의 ‘경춘전기’에는 사도세자가 용이 나오는 태몽을 꾸고, 그 내용을 담은 그림이 창경궁 경춘전에 걸려 있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흥미로운 점은 인조의 탄생 이야기가 조선 왕조의 으뜸가는 공식 기록인 실록에 실려 있다는 사실이다. 유학자들에게 현실에서 일어나기 어려운 것은 글쓰기의 대상이 아니었다는 점에서 이채로운 일이다. 실록에 탄생 이야기를 남긴 첫번째 왕이 인조라는 사실도 주목된다. 창업주인 태조조차 신이(神異)한 탄생 이야기를 실록에 남기지 못했다. 조선이 건국되고 200년이 훌쩍 넘은 시점에 16번째 임금부터 공식 기록에 탄생 이야기를 쓴 이유는 무엇일까.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박용만 책임연구원 ‘조선시대 국왕이 탄생이야기’란 제목의 글에서 “국왕의 탄생이야기가 갑자기 등장하게 된 것은 조선후기의 특수한 정치상황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분석했다. 

철종
◆용이 날고, 상서로운 빛이 감싸는…임금의 탄생

실록에 실린 인조 이래 여러 임금의 탄생 이야기는 반복되는 패턴을 보인다.

첫째, 임금을 상징하는 동물이나 사물이 나타난다. 말할 것도 없이 용이 단골이다. 숙종의 태몽에는 모후인 명성왕후의 침실에 용이 있었다고 하고, 영조의 태몽에는 그가 태어난 곳인 창덕궁 보경당으로 날아든 백룡이 등장한다. 정조의 태몽은 아버지 사도세자가 꾸었는데, 신룡(神龍)이 여의주를 품고 침실로 들어왔다. 사도세자는 이 꿈을 ‘성자(聖子)를 낳을 징조’라 여겨 흰 비단에 용을 그려 걸어두었다고 하니 아들을 얻게 된 기쁨이 컸던 모양이다.

헌종의 태몽에서는 ‘옥을 새긴 나무’가 임금의 상징으로 나온다. 어머니 신정왕후의 꿈에 아버지 익종이 나타나 옥을 새긴 나무를 갑에 담아 주었다는 것이다. 

정조
둘째, 상서로운 자연현상이 종종 보인다. 효종은 태어날 때 흰 기운 세 가닥이 ”침실에 날아 들어와 서쪽 창 사이에 엉겨 있었다”고 한다. 영조가 태어나기 사흘 전에는 “붉은 빛이 동방에 뻗치고 흰 기운이 그 위를 덮었다”고 하며 정조가 태어나기 하루 전에는 “큰 비가 내리고 우레가 치며, 구름이 자욱했다”고 한다. 순조의 경우에는 “오색 무지개가 묘정(廟井)에서 하늘로 뻗치고, 신이한 빛이 궁림(宮林)을 둘러쌌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셋째, 왕의 재목임을 나타내는 신체적 특징과 거둥이 묘사된다. 정조와 순조는 우뚝한 콧날이 용의 얼굴과 같았다고 했는데, 인조의 사례처럼 이 역시 한 고조 유방의 외모와 유사한 특징이다. 영조는 오른팔에 용이 서린 듯한 무늬가 아홉개 있었다고 하고, 철종은 순조와 외모가 비슷했다고 설명하고 있다. 백일이 되기도 전에 일어섰다는 헌종의 사례는 비범한 능력을 상징한 것이다.

◆정통성 확립에 골몰한 권력, 신기한 이야기를 만들다

조선은 ‘신화의 시대’가 아니라 ‘인간의 시대’였다. 더구나 유학자들은 현실에서 일어날 수 없는 것를 기록으로 남기거나, 망자의 행적을 과장하거나 미화하는 걸 꺼렸다. 그렇다면 조선에서 갑작스럽게 임금의 신이한 탄생 이야기가 만들어진 이유는 뭘까. 임금, 정권의 정통성 확립과 관련이 깊다. 

영조
실록에 탄생 이야기가 실린 임금들 모두가 그런 건 아니지만 정통성에 흠집이 있는 사례가 상대적으로 많다. 인조부터가 그렇다. 인조는 광해군을 몰아낸 뒤 등극했고, 이 과정을 주도한 것은 인조 자신이 아니라 반정의 공신들이었다. 영·정조 역시 마찬가지다. 영조는 형인 경종의 죽음에 책임이 있다는 의심이 일면서 집권 초기 정통성 시비가 끊이지 않았다.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가 죄인으로 죽었다는 사실이 결정적인 흠결이었다. 영조가 승정원일기에서 사도세자와 관련된 일체의 기록을 삭제하도록 해야 할 만큼 정조의 정통성은 확고하지 못했다.

권력을 독점한 정치세력의 이해와도 맞물린 현상이었다. 후기에 이르러 권력을 오로지 한 특정 가문은 자신들이 지원하는 임금의 탄생을 신성하게 하고, 그 임금에게 힘을 실어준 자신들을 정당성을 확보하려 했다. 왕실붙이이기는 했으나 강화도에서 내내 살다 갑자기 임금이 된 철종의 탄생 이야기에서 이런 특징이 두드러진다. 철종대에 수렴청정을 한 순원왕후는 친정아버지 김조순이 어린 아이를 올리며 잘 기르라 했다는 꿈을 꾸었다고 한다. 김조순은 안동김씨 가문을 이끌며 세도정치의 막을 연 인물이다.

박 연구원은 “더 이상 신이한 이야기를 믿지 않는 근대라는 시대성을 도외시하고, 혈통을 강조하며 정통성을 강화하려는 왕실의 의도와 자신들의 정치권력을 지속적으로 유지하려던 정치집단의 이해가 맞물린 결과였다”며 임금 탄생 이야기의 성립 이유를 분석했다.

강구열 기자 river910@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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