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적·사회적 불안감이 커지는 시점에서 무슬림 난민 신청자들이 떼를 지어 들이닥치니 신경이 곤두섰을 것이다. 난민 관련 가짜뉴스까지 판치면서 불길이 거세게 번진다. 우리가 난민에 대해 심각하게 생각해 본 적이 없다는 점이 그런 경향을 부추겼을 것이다. 정부도 난민에 관한 언급을 피할 정도다.
박완규 수석논설위원 |
우리나라는 1992년 ‘난민 지위에 관한 협약’에 가입했고 2013년 인도적 차원에서 난민을 받아들이는 난민법이 시행됐다. 1994년부터 난민 신청을 받았지만 2001년에야 처음 난민이 인정됐다. 지난해까지 난민 심사를 받은 외국인은 2만여명에 달하는데 이중 800여명만 난민으로 인정됐다. 난민 인정률이 약 4%에 불과하다. 난민 지위를 인정받으려면 박해받은 사실을 입증해야 하고 법무부는 엄격한 잣대로 심사하니 통과하기가 어렵다.
공개적으로 난민 수용 반대 의견을 펴는 사람이 많다. 법무장관을 지낸 이는 “난민 신청자들이 불법체류자가 돼서 우리 딸들을 빼앗아 간다”고 했다. 여성 영문학자는 “여러 남성 무슬림은 이교도 여성을 납치해서 집단 성폭행한 후에 죽이거나 팔아넘기는 것을 죄로 생각하지 않는다”며 “우리 딸들을 집단 성폭행, 살해의 제물로 내모는 인도주의가 과연 인도주의인가”라고 물었다. 난민과 무슬림에 대한 편견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난민 옹호 발언에 대해서는 많은 사람이 ‘감성팔이’라고 비난한다.
우리 사회의 공적 문제 논의 수준을 돌아보게 된다. 난민 문제를 어떻게 다뤄야 할지에 대해 우리 사회가 심각하게 고민해야 한다. 세계인권선언은 “모든 사람은 박해를 피해 타국에 피난처를 구하고 체재할 권리를 가진다”(제14조)고 규정한다. 난민 문제는 인도적인 차원에서 다룰 일이다. 난민 심사가 진행 중인데 벌써부터 반대할 일인지 생각해봐야 한다. 조국 청와대 민정수석은 ‘보노보 찬가’에서 “우리 안의 인종차별주의는 난민 인정 속에서 드러난다”고 했다. 반(反)난민 정서가 다문화가정 지원 정책에까지 불똥이 튀고 있다고 한다. 유럽에서 극성부리는 제노포비아(외국인 혐오)가 우리나라에 발붙이는 게 아닌가 하는 걱정이 든다.
호주 평화학자 스튜어트 리즈는 ‘평화를 향한 열정’에서 난민 문제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사람들이 스스로 느끼는 안보감은 다른 이들을 배제하고자 하는 욕망에서 나온다. … 어디에서 난민들이 왔고, 그들은 누구며, 왜 도망쳐야 했는지에 대해 질문하기를 주저한다면 고정관념에 대한 의존성은 지속될 수밖에 없다.”
좋은 질문이 좋은 답을 내는 법이다. 제주도의 예멘인들을 난민으로 받아들일지가 아니라 그들이 누구인지, 왜 자기 나라에서 도망쳤는지를 물어야 한다. 사람은 모르는 것에 두려움을 갖기 마련이다. 이들에 대한 제한된 지식이 난민에 관한 우리의 인식이나 논의의 수준을 끌어내리고 있다. 타자에 대한 공감은 인간이 기본적으로 갖춰야 할 도리다. 타자가 이런저런 이유로 고통받고 있다면 더욱 그래야 한다. 난민 문제야말로 우리 스스로를 되돌아볼 수 있는 좋은 기회다.
박완규 수석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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