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 지구촌은 불만과 비관이 비등하는 시공간이다. 그러나 인류가 과거 어느 때보다 풍요한 삶을 누리는 것도 엄연한 사실이다. 과학기술과 경제성장의 이중주가 일등공신이다. 글로벌 경제를 뒷받침하는 국제무역도 훈장감이다. 자유무역 질서에서 배제된 나라들, 이를테면 북한의 궁핍한 사정만 봐도 그 가치는 자명하다. 6일 터진 폭탄은 그래서 불길하다. 그 질서에 금을 내고 있다.
이승현 논설고문 |
다른 하나는 소프트웨어다. 이쪽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무역 장벽을 철폐하면 모두에게 이익이 된다”는 믿음이어서다. 글로벌 자유무역 질서의 뿌리다. 물론 모두가 자유무역에 만족하는 것은 아니다. 그래도 이것이 없었다면 풍요도 없었을 것이다. 미·중에 이어 유럽연합, 러시아 등까지 가세한 무역전쟁 난기류는 그래서 위험하다. 눈에 보이지 않는 가치를 뿌리째 흔들고 있다.
일각에선 낙관론이 개진된다. 치킨게임은 모두에게 손해인 만큼 타협점이 나올 것이란 시각이다. 문재인정부도 그렇게 보는 모양이다. 백운규 산업통산자원부 장관은 최근 실물점검회의에서 ‘단기적 영향은 제한적’이라고 했다. 이런 시각이 타당할 수도 있지만 문제점도 없지 않다. 현재의 난기류가 초대형 태풍의 전조인지 아닌지, 아무도 모른다는 점이다. 그런데도 “소나기나 뿌릴 것”이라 예보하는 이들이 엄존한다. 정부마저 그렇게 하고 있다.
대한민국 경제가 정치·북한 리스크에도 불구하고 의연히 버티는 것은 세계경제 호황 덕분이다. 그 축이 망가지면 날개 없는 추락을 각오해야 한다. 더욱이 미국 제재는 ‘중국제조 2025’를 정면 겨냥하고 있다. 트럼프의 변덕이 아니라 미국 조야의 대중 경계심이 기름을 붓고 있다는 뜻이다. 그래서 ‘패권전쟁’ 분석이 불거지는 것이다. 미국 군함이 7일 대만해협을 통과한 것도 유념할 일이다. 이런 국면에 낙관이 능사인가. 하물며 정부가 소나기 예보나 해서야 되겠는가. 한반도 기후대가 통째로 변할지도 모를 판국인데….
국민 안전과 재산을 책임진 정부는 최악의 시나리오에 대비할 책무가 있다. 대한민국은 미국과는 ‘동맹’, 중국과는 ‘전략적 동반자’ 관계라고 자랑한다. 그 둘은 진정 양립 가능한가. 이번 충돌이 던지는 근원적 질문이다. 정신을 바짝 차리고 국가 생존전략을 총점검해야 한다. 우리 수출의 4분의 1이 중국으로 쏠리는 대중 의존 체제가 지속 가능한지, 건설적 대안은 무엇인지부터 철저히 따져볼 국면이다.
덩샤오핑은 “검은 고양이든 흰 고양이든 쥐만 잘 잡으면 된다”고 했다. 흑묘백묘(黑猫白猫)론이다. 이념은 중요치 않다는 맥락으로 흔히 인용된다. 하지만 다른 측면도 있다. 흑묘백묘론 자체가 발상의 대전환이고, 이념의 소산이란 측면이다. 덩샤오핑은 이 믿음으로 중국을 재편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 나라와 세상을 바꾼 것이다. 자유무역의 믿음은 그보다 더 심대하게 세상을 바꾼 신념 체계다. 그것이 위협받고 있다. 위기의 징후다. 대한민국엔 더더욱 그렇다. 다른 것을 다 떠나 대한민국은 수출로 먹고사는 나라 아닌가. 위기를 기회로 바꾸는 혜안은 어디에 있나. 최악의 시나리오에 대응할 ‘컨틴전시 플랜’은. 5000만 국민이 엄중히 묻고 있다.
이승현 논설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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