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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61'이 알려준 성종 태항아리의 행방…고박 특별전 '조선왕실 아기씨의 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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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8-07-05 17:03:11 수정 : 2018-07-05 17:0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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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61’

조선 9대 임금 성종의 태항아리(왕족의 태를 담아 묻은 항아리)의 소재를 추적하던 국립고궁박물관(고박) 백은경 학예연구사는 국립중앙박물관(중박) 소장의 ‘백자능형뚜껑’에 적힌 이 관리번호를 보는 순간 확신을 갖게 됐다. 국립민속박물관(민박)의 외항아리에도 같은 숫자가 동일한 필체로 적혀 있었다. 두 유물이 한때 하나로 관리되었다는 걸 보여주는 것. 고박의 내항아리와 태지석까지 더해 세 박물관의 소장품이 한 세트였다는 건 앞서 성종 태항아리의 원형을 찍은 일제강점기의 사진을 보면서 자신하고 있었는데, 이를 뒷받침하는 객관적 증거를 확보한 것이다. 이로써 1930년대 흩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성종 태항아리가 온전한 형태를 갖출 수 있는 근거가 마련됐다. 
성종 태항아리. 태지석, 내항아리, 외항아리, 외항아리 뚜껑, 별도 뚜껑(뒷줄 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 구성된 조선 성종 임금의 태항아리. 1930년 일제가 원래 태실에서 파내 경기도 고양의 서삼릉으로 이전하면서 한 세트를 이루던 것이 흩어졌고, 지금도 국립박물관 3곳에 분리돼 소장되어 있다. 국립고궁박물관 제공
고박에서 9월까지 진행되는 특별전 ‘조선왕실 아기씨의 탄생’은 태항아리를 한 자리에서 볼 수 있는 드문 기회다. 대부분이 고박 소장품인데 눈길을 끄는 건 중박, 고박, 민박 등에 각각 보관 중인 7건이다. 이 중 성종, 인성대군(8대 임금 예종의 장남)의 태항아리는 이번 전시회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소장처가 처음 확인됐다. 태항아리를 구성한 내·외항아리, 태지석, 별도 뚜껑이 각기 흩어지고, 박물관의 소유가 되었음에도 소장한 지 수십년이 지나서야 확인된 이유는 무엇일까. 일제가 1930년 전국 각지의 태실(태항아리를 봉안한 곳)에 있던 태항아리를 파내 경기도 고양시의 서삼릉에 한데 모은 데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조선 왕실은 자손이 태어나면 전국의 길지를 찾아 태실을 조성했다. 그곳에 묻힌 태항아리는 태의 주인을 밝힌 태지석과 태를 담은 내·외항아리가 한 세트였고, 성종의 것처럼 외항아리 위에 두는 뚜껑이 추가된 것도 일부 있었다.

왕실의 번창, 국가의 안녕에 대한 염원을 담은 태실은 일제강점기에 처참하게 훼손됐다. 일부는 도굴의 대상이 됐고, 일제는 이를 안전한 관리라는 빌미로 각지의 태항아리를 파낸 뒤 서삼릉 한 곳으로 모으는 작업을 시작했다. 그런데 일제는 파낸 태항아리를 고스란히 묻지 않았다. 태항아리 세트 중 당시 인기가 높았던 분청사기로 된 부분을 빼돌려 자기들이 세운 이왕가박물관에서 따로 관리한 것이다. 한 몸을 이루던 태지석, 내·외항아리, 별도 뚜껑의 생이별은 이렇게 시작됐다. 백 연구사는 “태실을 옮기는 과정에서 분청사기 태항아리 등을 일부 선별해 낸 후, (빠진 부분에는) 새로 만든 백자 태항아리를 넣었다”고 밝혔다.

서삼릉에 묻힌 54기의 태항아리는 1996년 발굴조사 후 고박에 소장되었으나 이왕가박물관의 소장품이 된 것들은 해방 이후에도 필요에 따라 소장처를 바꾸며 전전했다. 성종 태항아리의 경우 서삼릉에 묻힌 내항아리와 태지석은 고박이 보관하고 있으나 일제가 빼돌린 외항아리는 이왕가박물관, 장서각, 한국민속관을 거쳐 민박 소장품이 됐다. 별도의 뚜껑은 이왕가박물관에서 창덕궁, 중박으로 옮겨진 것으로 추정된다.

문제는 이 과정에서 인수, 인계가 제대로 되지 않거나 관련 자료가 사라지기도 하면서 유물의 내력을 확인하기 어렵게 된 점이다. 백 연구관은 고박, 민박, 중박 소장품을 일제가 찍은 원래 성종 태항아리의 사진 속 그것과 형태를 비교하고, 동일한 필체의 관리번호까지 확인한 끝에 흩어진 성종 태항아리의 소재를 파악했다. 인성대군 태항아리의 태지석·내항아리는 ‘서삼릉 매장→고박’, 외항아리는 ‘이왕가박물관→장서각→궁중유물전시관→고박’, 별도 뚜껑은 ‘이왕가박물관→중박’의 소장처 변화를 거친 것으로 파악됐다.

성종과 인성대군 태항아리의 소장처 확인은 90년 가까운 생이별을 끝낼 단초가 된다는 점에서 큰 성과지만 박물관 유물 관리의 실태와 과제를 재확인시키는 것이기도 하다.

우선, 각 박물관의 수장고에는 태항아리와 비슷한 이유로 어디에, 어떤 형태로, 왜 있었던 것인지 등을 모른 채 그저 잘 보관되고 있는 것들이 많다는 점이다. 이 때문에 박물관에 소장된 유물의 내력을 밝히는 ‘수장고 발굴’이란 말이 회자될 정도다. 한 박물관 관계자는 “한국의 박물관이 일제강점기에 출처를 알 수 없는 유물들을 모으면서 시작된 측면이 있다”며 “해방 이후에도 부실한 자료 관리에다 예산, 인력 부족 등이 겹치면서 유물에 대한 조사를 소홀히 했던 것이 현재까지 이르고 있다”고 지적했다.

성종, 인성대군 태항아리처럼 원형이 밝혀진 경우 흩어져 보관되고 있는 것들은 한데 모아 온전한 형태를 회복해 관리해야 한다는 지적도 강하다. 다른 박물관 관계자는 “태항아리처럼 한 세트라는 것이 명확해지면 한 곳에서 관리하는 게 맞다. 국립기관에서 소장 중인 만큼 영구임대나 이관 등을 논의하는 것이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닐 것”이라고 말했다. 원주 법천사지 지광국사탑(국보 101호)의 일부이던 사자상이 중박에 보관 중이던 사실이 뒤늦게 밝혀져 지광국사탑 복원을 맡은 국립문화재연구소에 2016년 이관된 사례도 있다.

강구열 기자 river910@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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