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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의역사] (7월2~8일) ‘이방인’의 나라 탈피한 알제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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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8-07-01 21:06:59 수정 : 2018-07-01 21:06: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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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2년 알제리가 프랑스로부터 독립한 것은 2차 세계대전 이후 자주 일어났던 아프리카 식민지의 독립과는 달랐다.

프랑스에게 알제리는 아프리카에 있는 식민지가 아니라 프랑스 본토 같은 존재였다. 그래서 총독이 아닌 3명의 주지사가 다스리는 식이었다.

그것은 역사적으로 알제리가 갖는 특성 때문이었다.

알제리에는 베르베르인이 토착민으로 살아왔으나 고대부터 페니키아인, 로마인, 반달족 등 수많은 유럽인의 지배를 받으면서 문화와 혈통의 혼합을 경험해 왔다.

1830년 알제리는 프랑스 식민지가 된 데다 1870년의 보불전쟁에서 프랑스가 패해 알자스로렌을 잃자 그곳의 난민이 대거 몰려오기도 했다.

소설 ‘이방인’으로 유명한 소설가 알베르 카뮈의 할아버지도 그중 하나였다.

그럼에도 혈통에 따른 차별이 심한 것은 스페인의 남미 식민지처럼 극심해 토착민은 오래전부터 크고 작은 항거를 계속해 왔다.

프랑스가 디엔비엔푸 전투에서 패배해 베트남에서 철수하던 해인 1954년 11월1일에는 민족해방전선(FLN)이 결성돼 본격적인 해방전쟁에 돌입했다.

그 해방운동을 진압하기 위해 ‘세계 제일의 문화국’이 취한 조치는 야만적인 것으로 악명이 높았다. 특히 프랑스 판 고문기술자 폴 오사르스의 활약은 세계를 경악시켰다.

눈길을 끄는 것은 그가 나치 치하의 프랑스에서 레지스탕스로 활약했다는 점이다. 자신의 조국을 찾기 위해 분전했던 그가 알제리판 레지스탕스 활동을 하는 이들을 압살하는 데 앞장선 셈이다.

오사르스는 알제리가 해방되자 베트남 전쟁에 종사하는 미국 CIA에 그 기술을 전수했고 그 뒤에는 악명 높은 칠레의 피노체트 정권에도 기여했다.

알제리 해방을 바라보는 카뮈의 자세도 애매해 그는 알제리인은 물론 프랑스 지식인 사회에서도 비난을 받았다. 그래서 알제리인은 이 ‘조국 태생의 세계적 문호’를 자랑하지 않았다.

양평(언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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