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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P "백날을 물어봐, 내가 대답하나"…'트로이카 3金 시대' 역사의 뒤안길로

입력 : 2018-06-23 14:16:18 수정 : 2018-06-23 16:37: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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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전 대통령은 1972년 10월 유신 개헌을 통해 대통령의 지위와 권한을 강화하고 국회의 권한과 지위를 축소하면서 초법적 독재 체제를 강화했다. 사진은 1972년 12월27일 당시 김종필 국무총리가 유신헌법을 공포하는 모습. 자료사진
김종필(JP) 전 국무총리가 23일 오전 8시15분 서울 중구 신당동 자택에서 숙환으로 별세했다. 이로서 고(故) 김대중(DJ)•김영삼(YS) 전 대통령과 함께 불린 '트로이카 3김 시대'는 역사의 뒤안길로 퇴장하게 됐다.

1926년 충남 부여에서 태어난 김 전 총리는 공주중•고등학교와 서울대 사범대,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했다.

1961년 박정희 전 대통령과 함께 5•16 쿠테타를 주도하면서 현대 정치사의 전면에 등장했다. 같은 해 중앙정보부(현 국가정보원)를 창설해 초대부장에 취임하기도 했다.

1963년 공화당 창당 준비위원장으로 창당 작업을 도맡았고, 그 해 치러진 6대 총선에서 당선된 뒤 7•8•9•10•13•14•15•16대를 거치며 9선 국회의원을 지냈다.

김 전 총리는 중앙정보부장 시절 한일 국교정상화 회담을 막후에서 이끌었으나, 대일 청구권 문제의 핵심이 된 '김종필-오히라 메모' 파동으로 6•3사태가 일어나자 1964년 외유길에 오르기도 했다.

이후 1967년 제7대 총선에서 당선됐지만 이듬해 의원직과 모든 공직에서 사퇴했다가 1970년에 민주공화당 총재 수석상임고문으로 추대돼 정계에 복귀했다.

1971년 민주공화당 부총재를 지내고, 같은 해부터 1975년까지 국무총리를 지냈다.

1979년 10•26사태 이후 공화당 총재 자리까지 올랐으나 1980년 신군부에 의해 정치활동이 금지되고, 부정축재자로 지목되면서 재산환수 등의 수난을 겪기도 했다.

1984년 미국으로 건너가 유랑생활을 하다가 1986년 귀국한 김 전 총리는 1987년 정계에 복귀해 신민주공화당을 창당, 같은 해 13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지만 낙선한다. 그러나 이듬해 13대 총선에서 당선된다.

1992년 대선에서 김영삼(YS) 당시 대선 후보를 지원했으며 1995년 자유민주연합(자민련)을 창당, 1997년 대선에서 자민련 후보로 대권에 도전한다.

그러나 선거 막판 일명 'DJP(김대중•김종필) 연합'을 성사시키며 김대중(DJ) 당시 대선 후보에 대한 지지를 선언, 첫 수평적 정권교체와 함께 새정치국민회의•자민련 공동정권을 탄생시킨다. DJ 정부에선 두 번째 국무총리직을 역임한다.

하지만 2001년 내각제 개헌 파동과 임동원 당시 통일부 장관 해임안 가결 및 공조 파기로 인해 DJ와 결별했다. 2004년에는 노무현 전 대통령 탄핵 역풍으로 17대 총선에서 참패하며 10선 도전에 실패했고 정계 은퇴를 선언했다.

고인은 JP라는 별칭 외에도 '영원한 2인자', '풍운의 정치인', '처세의 달인' 등으로 불리며 한국 현대사에 큰 족적을 남겼다는 평가를 받는다.

김 전 총리는 정치판에서 온갖 산전수전을 겪으면서도 풍부한 은유와 비유, 고사성어를 이용한 간접화법을 이용해 정치상황이나 자신의 심정을 함축적으로 표현하는 '촌철살인'에 능했다.

다음은 생전에 고인이 남긴 주요 어록.

△ 제2의 이완용이 되더라도 한일 국교를 정상화시키겠다(1963년. 일본과의 비밀협상이 국민적 반발에 직면하자)

△ 자의 반 타의 반(1963.2.25. 4대 의혹 사건과 관련한 외유에 나서면서)

△ 파국 직전의 조국을 구하고 조국 근대화를 이루기 위해 5•16 혁명과 1963년 공화당 창당이라는 역사적 전기가 마련됐다(1987년 저서 '새 역사의 고동')

△ 5•16이 형님이고 5•17이 아우라고 한다면 나는 고약한 아우를 둔 셈이다(1987.11.3. 관훈토론회)

△ 나는 대통령의 그림자도 밟지 않는다(1990년 10월. 노태우를 대통령 후보로 추대하며)

△ 역사는 기승전결로 이루어진다. 5•16은 역사 발전의 토양이다. 박정희 대통령은 역사를 일으킨 사람이며 전두환, 노태우 대통령은 그 계승자이고, 김영삼 대통령의 변화와 개혁은 그 전환에 해당된다(1993.5.16. 5•16 민족상 시상식)

△ 있는 복이나 빼앗아가지 마시라(1995.1.1. 민자당 대표시절 민주계의 대표퇴진론을 거론하는 세배객이 '새해 복 많이 받으시라' 덕담하자)

△ 경상도 사람들이 충청도를 핫바지라고 부르는데 이것은 아무렇게나 취급해도 아무말 없는 사람, 소견이나 오기조차도 없는 사람들이라는 의미다(1995.6.13. 지방선거 천안역 지원유세)

△ 역사는 끄집어 낼 수도, 자빠트릴 수도, 다시 세울 수도 없는 것이다. 역사는 그냥 거기서 배우는 것이다(1996년 김영삼 대통령의 역사 바로세우기에 대해)

△ 요즘 세대교체를 자꾸 말하는데 이스라엘의 골다 메이어 총리는 74세에 총리가 돼 4차 중동전을 승리로 이끌었다(1996.5.18. 대구 신명여고 강연)

△ 줄탁동기(1997년 자신의 대선 후원조직인 민족중흥회 회보에 사용한 신년휘호로 중국 송나라 선종의 대표적 전적인 벽암록에 나오는 글귀. 병아리가 건강하게 부화하고자 알 속에서 두드려 나갈 때가 됐음을 알리고 어미닭도 이때를 놓치지 않고 밖에서 알을 쪼아 껍데기를 깨줘야 하는 것처럼 모든 일은 시기가 적절히 맞아야 한다는 뜻으로 당시 대선 정국에서 적절한 시기의 결단이 필요함을 간접적으로 나타냈다는 해석이 나옴)

△ 내가 제일 보기 싫은 것은 타다 남은 장작이다. 나는 완전히 연소해 재가 되고 싶다(1997.5.29. 자민련 중앙위원회 운영위)

△ 이인제 후보가 우리를 늙었다고 하는데 나와 함께 씨름 한 번 했으면 좋겠다. 내가 결코 이 후보에게 뒤지지 않을 것이다. 나는 아직도 젊다(1997.12.3. 충북 괴산 정당연설회에서)

△ 서리는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슬금슬금 녹아 없어지는 것이다(1998.6.27. 총리 서리 당시 '서리' 꼬리가 언제 덜어질 것 같냐는 기자들의 질문에)

△ 시인 프로스트가 '잠들기 전 가야 할 몇 마일이 있다'고 한 것처럼 저도 앞으로 가야 할 몇 마일을 위해 발걸음을 재촉하겠다(1998.10.16. 동의대 명예박사학위 수여식 특강)

△ 대통령중심제 하에서 총리의 위치라는 게, 아무리 공동정권이라지만 '델리키트'하다(1998.10.25. 총리가 안다고 앞장서거나 무리하게 밀어붙이는 행동은 바람직하지 않다며)

△ 미리 왕성한 상상력과 편협한 시각을 가지고 스스로의 행보를 좁히거나 의지를 약화시키는 일을 자초해서는 안 된다. 때를 맞춰야 하고 그러고도 안 될 때 몽니를 부리는 것이다(1998.12.15. 김대중 대통령의 내각제 약속 불이행 우려 관련 자민련 중앙위원회 연수에서)

△ 백날을 물어봐, 내가 대답하나(2000.5.2. 일주일만에 당사에 출근하면서 김대중 대통령과의 회동 가능성을 묻는 질문에)

△ 나이 70이 넘은 사람이 저물어 가는 사람이지 떠오르는 사람이냐. 다만 마무리할 때 서쪽 하늘이 황혼으로 벌겋게 물들어갔으면 하는 과욕이 남았을 뿐이다(2001.1.9. 민주당 이인제 최고위원이 4•13 총선 때 자신을 '서산에 지는 해'로 표현한 것을 두고)

△ 박정희 전 대통령을 깎아 내리려는 못된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당신들이 오늘날 사람답게 사는 것은 박 대통령이 기반을 굳건히 다져 그 위에서 마음대로 떠들고 춤추고 있는 것이라고(2005.10.28. 박정희 전 대통령 26주기 추도식)

김현주 기자 hjk@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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