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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영원한 2인자' 김종필…영욕과 부침속 엇갈린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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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8-06-23 14:16:40 수정 : 2018-06-23 17:5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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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2인자’ 김종필(JP) 전 국무총리가 23일 오전 향년 92세로 별세했다. 이로써 김대중·김영삼·김종필 트로이카가 1960년대부터 이끌어왔던 '3김(金) 시대'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김 전 총리에 대한 평가는 극명하게 엇갈린다. 한국의 산업화를 이끈 안목 있는 정치인이자 최초의 수평적 정권교체에 기여한 킹메이커였다는 긍정적인 평가가 있다. 반면 군사 쿠데타로 한국의 민주화 후퇴, 독재 강화, 인권 탄압, 3당 합당으로 한국정당정치 퇴행, 지역주의 선동 등 부정적 평가도 있다. 군사 쿠데타 원조, 중앙정보부 창설자, 풍운의 정치인, 영원 2인자, 경륜의 정치인, 처세의 달인 등 그의 별칭처럼 김 전 총리는 영욕과 부침을 거듭한 셈이다.
1960년 예편한 김종필(왼쪽)은 처삼촌 박정희 소장과 함께 5·16 쿠데타를 기획했다.

◆군사 쿠데타로 군부정권 실세 부상

지난 1926년 충남 부여에서 태어난 김 전 총리는 공주중·고등학교와 서울대 사범대,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했다. 그는 1961년 처삼촌인 박정희 전 대통령의 5·16 쿠데타에 가담해 군부 정권을 세웠다. 같은 해 중앙정보부를 창설해 초대부장에 취임한 것을 시작으로 줄곧 영원한 '제2인자의 길'을 걸어왔다.

그는 1963년 공화당 창당을 주도하고 그해 치러진 6대 총선에서 당선된 뒤 7·8·9·10·13·14·15·16대를 거치며 9선 국회의원을 지냈다.

탄탄대로를 걷던 그는 공화당 창당과정에서 증권파동, 워커힐 사건, 새나라자동차 사건, 빠찡꼬 사건 등 ‘4대 의혹사건’에 휘말리면서 63년 2월 ‘자의반 타의반’ 첫 외유를 떠났다. 그러나 곧 귀국해 같은 해 치러진 6대 총선에서 고향인 부여에서 당선됐고 이어 공화당 당의장에도 임명되는 등 정치 무대의 전면에 데뷔했다.

이번에는 외교 파동이 발목을 잡았다. 1962년 한일 국교정상화 회담의 쟁점이던 대일 청구권 문제와 관련해 이른바 '김-오히라 메모'가 뒤늦게 공개되면서 굴욕외교를 비판하는 6·3사태가 일어나자 1964년 또다시 2차 외유길에 올랐다.

정치적 부침을 겪던 그는 1971년부터 1975년까지 4년 6개월 간 국무총리를 지내며 승승장구했다.
1989년 당시 민주당 김영삼 총재(오른쪽), 평민당 김대중 총재(가운데), 공화당 김종필 총재가 여권의 중간평가 조기강행 대책을 논의하기에 앞서 악수하는 모습.
◆충청 기반 정치 재개...DJP공동정권 수립

정권 2인자로 군림하던 김 전 총리는 1979년 박정희 전 대통령이 서거하면서 내리막길을 걷게 된다. 1980년 신군부의 등장과 함께 권력형 부정축재자 1호로 몰려 영어의 몸이 되기도 했다.

그는 1984년 미국으로 건너가 유랑생활을 하다 1986년 귀국한 뒤 신민주공화당을 창당하고 1987년 13대 대선에 출마했다가 낙선했다.

그러나 그는 1988년 13대 총선에서 충청권을 기반으로 35석의 국회의원을 확보했다. 오뚝이처럼 정치 일선 복귀에 성공한 것이다. 1992년 대선에서 평생의 꿈인 내각제를 고리로 3당 합당에 참여해 김영삼(YS) 당시 대선 후보를 지원했으나 내각제를 관철하지는 못했다.

절치부심하던 김 전 총리는 1997년 대선에선 자신이 창당한 자유민주연합 후보로 다시 대권에 도전했다. 내각제를 염두에 뒀던 그는 선거 막판 ‘DJP(김대중·김종필) 연합’을 성사시키고 김대중(DJ) 당시 대선 후보에 대한 지지를 선언했다. 이를 통해 첫 수평적 정권교체와 함께 국민회의·자민련 공동정권을 탄생시켰다.
2004년 4월 19일 김종필 자민련 총재(JP)가 마포당사에서 정계은퇴를 선언한 뒤 자리에 앉아 있다.

그러나 내각제 파동에 이어 16대 총선 과정에서 공동정권 수장간 앙금까지 생기면서 공조파기로 이어졌다. 2001년 9월 임동원 당시 통일부 장관 해임안 가결이 되면서 공동정권은 붕괴된 것이다.

김 전 총리는 2004년 17대 총선을 통해 재기를 시도했으나, 자신의 10선 도전 실패와 함께 고작 4명의 의원만 배출하는 참패를 당한 뒤 정계은퇴를 선언했다.

이도형 기자 scope@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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