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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궁궐 공원화는 '일제 통치 정당화' 작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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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8-06-23 13:00:00 수정 : 2018-06-23 15:4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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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한복판의 쉼터 궁궐?…궁궐 공원화가 악몽이 된 이유 / 일제, 공원화로 궁궐 마구잡이 훼손 / 해방 후에도 ‘궁궐=공원’ 인식 이어져
광명문으로 제자리에 돌리기 위한 작업을 시작하기 위해 현판을 내리고 있다.
“덕수궁 중심영역의 공원화 계획으로 돈덕전마저 헐려나가고, 함녕전의 정문이었던 광명문도 지금의 자리로 옮겨져 유물을 보관하는 전시관으로 변해버렸다.”

‘덕수궁, 제 모습 찾기 본격적으로 시작’이란 제목으로 지난 19일 문화재청이 배포한 보도자료 내용 중의 일부다. 일제강점기 덕수궁 훼손의 한 원인으로 ‘공원화 계획’을 지목하고 있다는 점이 주목된다. 쉼터나 놀이 공간으로 특정 공간을 공원화한다는 것은 지금의 관점에서 보면 크게 반길 일이다. 궁궐이 현실적으로 공원의 기능을 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5대 궁궐은 넓은 대지 위에 전각과 아름드리 나무, 연못 등이 어우러져 이 곳을 찾은 시민들에게 큰 활력소가 된다.

그러나 궁궐 본연의 기능과 의미 등을 부정하거나, 무지한 이들에게 ‘공원화’는 궁궐에 치명적 훼손을 가할 때 동원하는 허울좋은 명분이었던 시절이 있었다. 궁궐 훼철이 극으로 치달았던 일제강점기, 궁궐을 대형의 놀이터 정도로나 여겼던 1960∼70년대에 그랬다. 
◆헐리고, 훼손된…악몽이 된 궁궐의 공원화

일제가 궁궐 변형에 대한 준비를 시작한 것은 1906년 통감부를 설치한 직후로 여겨진다.

궁궐 공원화의 첫 타겟이자 가장 큰 타격을 받은 건, 잘 알려져 있다시피, 창경궁이다. 창경궁에 동물원, 식물원, 박물관을 만들자는 제안이 나온 것은 1907년으로 알려져 있다. 이해 겨울 덕수궁에서 창덕궁으로 거처를 옮긴 순종이 즐겁게 생활할 수 있도록 인접한 창경궁을 동물원 등으로 꾸미자는 제안을 했다고 한다. 조선인들에게 “취미를 부여하고, 지식을 공급하며 고상한 오락을 제공한다”, “경성의 삭량(索凉)함을 부수는 계기가 될 것”이라는 선전도 곁들였다. 이듬해 동물원이 만들어졌고, 1909년 동·식물원이 개장해 일반인의 관람이 시작됐다. 1911년, 1915년에는 박물관, 장서각이 각각 건립되었다. 없던 것들을 들여놓아야 하니 있던 건물들을 헐어낼 수밖에 없었다. 정전인 명정전 일대를 제외한 창경궁의 건물 대부분이 헐렸고 1911년부터 창경궁은 ‘창경원’으로 격하됐다.

경복궁에서는 1915년 일제의 한반도 통치 5주년을 기념한다며 ‘시정5주년물산공진회’라는 게 열리는 데 수많은 전각이 헐렸고, 그렇게 생긴 빈 자리에 공진회 관련 건물이 세워졌다. 경복궁의 정전인 동쪽에는 미술관이 건립됐다. 이것이 ‘조선총독부 박물관’이 된다.

덕수궁의 경우엔 1931년 이왕직(조선왕실 업무를 담당하던 조선총독부의 기구)에서 중앙공원화 계획을 발표했다. 당시 덕수궁 부지가 6만6000㎡(2만여 평)이었는데 절반 정도인 3만3000㎡(1만여 평)을 공원으로 만들겠다는 것이었다. 이 계획에 따라 1932년부터 전각의 수리와 해체, 정원의 축소가 진행됐다. 일본에서 가져온 벗나무를 심었고, 운동장을 만드는가 하면, 휴게소와 매점 등의 시설도 설치했다. 대한제국기에 세워진 석조전의 내부를 바꿔 미술관으로 바꾼 것도 이 맘때였다. 1933년 10월 1일에 개관한 미술관에는 조선미술품도 함께 전시하겠다는 애초 계획과 달리 일본 미술품만 전시되었다. 
조선총독부 청사는 경복궁 광화문을 다른 곳으로 옮긴 뒤 확보한 자리에 세워져 일제의 조선통치를 시각화했다.
◆‘조선을 지우라’, 일제가 공원화에 집착한 이유

수도의 한복판에 공원이 생긴다는 걸 부정적으로만 볼 수 있느냐고 물을 수 있다. 일제의 주장처럼 “경성의 삭량함을 부수는 계기”가 될 수도 있을 것이고, 집권층의 전유물이었던 궁궐을 백성들에게 되돌려주는 효과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일제가 공원화를 명분으로 궁궐 파괴에 집착한 근본적인 이유를 들여다보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일제의 궁궐 파괴는 조선을 지우기 위한 것이었다. 조선 통치의 상징이자 권력의 중심이었던 궁궐을 훼손함으로써 조선이 망했음을 분명하게 보여주려 했던 것이다. 이는 동시에 새로운 지배자 일제의 존재감을 부각하는 것이었다. 광화문을 다른 곳으로 옮긴 자리에 조선총독부를 세워 경복궁을 완전히 가려 버린 것에서 이런 의도가 가장 극적으로 드러난다.

신구 체제의 전환을 궁궐 공원화로 보여주는 방식은 앞서 일본에서 적용되었던 것이다. 일본은 1868년 도쿠가와 막부를 타도하고, 천황 중심의 새로운 권력 체제를 만들었다. 새로운 권력을 정당화하는 작업이 필요했고, 이는 앞선 권력의 신성성을 박탈하는 것에서 시작됐다. 도쿠가와 가문의 묘지가 있었고, 도쿠가와 막부를 연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기리는 궁사(宮社)이며 에도성을 지키는 군사기지였던 공간을 지금의 우에노 공원으로 바뀐 데는 이런 정치적 의도가 작동했다. 
덕수궁 광명문의 옛 모습과 지금의 모습. 광명문은 덕수궁 전각의 정문으로 쓰였으나 일제강점기에 엉뚱한 곳으로 옮겨졌다.

◆경복궁에 골프장을?…일제와 크게 다르지 않았던 정부의 궁궐 정책

해방으로 궁궐은 다시 우리의 품으로 돌아왔으나 제대로 된 대접을 받기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수십 년간의 식민지 경험, 해방 후 이어진 전쟁으로 궁궐 뿐만 아니라 문화재 전반에 관심을 둘 여유가 없었다. 상황이 변하기 시작한 게 1960년대였다.

정부는 궁궐의 보존 및 활용가치에 조금씩 주목하기 시작했다. “우리나라에 완전히 남아있는 문화재는 이조 500년의 다섯 궁이며 또한 수도의 중심에 자리 잡고 있어 문화재 애호와 관리의 관심을 높이고, 좋은 교육적 역사의 자료가 되며 외국인에게 한국문화의 소개자로서 한국 고유의 현상을 던져주는 가장 거대한 문화재”라고 평가했다. 1962~65년에는 5640만원의 예산을 들여 경회루 등 4곳을 비롯해 왕릉을 보수했다.

하지만 이때도 궁궐은 원형을 보존, 복원해야 할 대상이기보다는 각종 행사를 벌이기에 좋은 공간이라는 인식이 여전했다. 일제의 궁궐 공원화 정책과 별다를 게 없었던 것이다. ‘아메리칸 카우보이 쇼’, 국제 프로레슬링 같은 행사가 열렸고 1962년에는 5·16 쿠데타 1주년을 기념하는 산업박람회가 개최돼 30여 채의 전시관이 들어섰다.

산업박람회가 끝나고 문화재관리국은 경복궁 복구계획을 만들었는데, 이게 또 어처구니 없는 것이었다. 복구계획의 내용을 보면 당시에 궁궐을 어떻게 생각했는지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경복궁 보수 및 정원 설계’ 계획은 우리나라 최대 분수를 중심으로 동물원, 야외극장, 장미꽃 터널, 벚꽃단지 등을 조성하겠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거대한 ‘시민공원’을 조성하겠다는 의미였다. 일제가 창경궁과 덕수궁 등에 한 짓과 크게 다르지 않다. 1963년에는 경복궁을 사적 117호로 지정해 놓았으나 경회루의 동쪽에 골프장을 만들겠다는 계획을 발표하기도 했다. 다행히 비난 여론이 거세 전면 취소되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궁궐은 행사를 치르거나 시민들이 놀고 즐기는 유원지, 체육시설, 쇼비지니스 공간으로 활용되었던 것이다.

강구열 기자 river910@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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