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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수찬의 軍] "6.25는 선언으로 끝나지 않는다"…진정한 종전 해법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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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8-06-24 06:00:00 수정 : 2018-06-23 00:4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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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4월 27일 판문점 남측 평화의 집에서 열린 남북정상회담에서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은 도보다리를 산책하며 군사분계선(MDL) 표식을 함께 바라봤다.

높이 1m 크기의 나무 말뚝에 노란색 금속판이나 석면 시멘트판을 붙인 이 표식은 남쪽에서는 ‘군사분계선’이란 한글과 ‘MDL’이란 영어 글씨가, 북한쪽에서는 한자와 한글로 쓴 군사분계선이란 글씨가 보인다. 임진강변에서 강원도 동해안까지 한반도의 허리를 가로지르는 군사분계선에는 1292개의 표식이 설치되어 남과 북의 경계를 이루고 있다.

6.25 전쟁 정전협정 체결 직후 설치된 군사분계선 표식. 대부분 노후화되어 형체도 알아보기 힘들다. 게티이미지
오는 25일은 군사분계선 표식이 세워진 원인이 됐던 6.25 전쟁 68주년이 되는 날이다. 1950년 6월25일부터 1953년 7월 27일까지 3년 이상 계속된 6.25 전쟁은 남북 양쪽에서 군인 90만명, 민간인 250만명의 귀중한 생명을 앗아갔다.

남북, 북미정상회담으로 종전선언과 평화협정 체결 가능성이 높아지면서 70년 가까이 이어진 6.25 전쟁이 끝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가 높다. 하지만 종전선언과 평화협정만으로 6.25 전쟁의 상처가 모두 사라질 수는 없다. 6.25 전쟁에서 나라를 위해 헌신했으나 잊혀진 분들을 기억하면서 6.25 전쟁으로 생긴 우리 사회의 병폐를 치유해야 진정한 종전을 맞이할 수 있다.

◆나라 위해 헌신한 사람들 명예 지켜줘야

정부는 한반도 평화 분위기가 고조되는 상황속에서도 독일을 6.25 전쟁 의료지원국으로 추가 지정하고 해외 참전유공자 초청행사를 계속 개최하는 등 6.25 전쟁 당시 우리나라를 도왔던 외국인들을 기리는 행사를 지속하고 있다.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도 10여년째 전국을 누비며 6.25 전쟁 전사자 유해를 1만여구를 발굴, 유족 품으로 돌려보내는 작업을 진행중이다.

2017년 10월 26일 세종시 금남면 야산에서 육군 32사단 장병들이 6.25 전사자 유해 발굴 작업을 하고 있다. 세종=연합뉴스
하지만 비무장지대(DMZ)와 북한 지역에 묻혀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국군 전사자 유해를 찾는 일은 지금까지 이뤄지지 않았다. 2006년 5월 강원도 철원군 근남면 비무장지대 남측 지역에서 감시초소(GP) 보급로 공사 도중 국군 전사자 유해 1구가 발견된 것이 유일하다. 6.25 전쟁 초기에는 국군이 압록강까지 진격하면서 평안북도 운산, 개천, 함경남도 장진호 등에서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1.4 후퇴 이후에는 군사분계선을 중심으로 고지전투가 진행됐다. 이 과정에서 수많은 사망자와 실종자가 발생했고, 다수의 국군 포로가 수용소에서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북한 지역에 묻힌 전사자 유해가 송환된 것은 미국을 경유한 사례 뿐이다. 미국 국방부는 1996~2005년 북한에서 수습한 유해 449구의 신원을 확인하는 과정에서 국군 전사자 유해 27구를 발견, 2012년과 2016년에 우리 측에 송환했다.

지난 12일 북미정상회담에서 신원이 이미 확인된 6.25 전쟁 전사자 유해를 즉각 송환하기로 합의했다. 이에 따라 조만간 최대 200구의 유해가 미국으로 돌아가게 될 전망이다. 북한 지역 내 유해발굴 재개도 거론된다. 새로 확보된 유해의 신원을 확인하는 과정에서 국군 전사자나 실종자 유해가 추가 발견될 가능성이 있다.

정부 차원에서의 유해 발굴도 거론된다. 문재인 대통령은 6일 제63회 현충일 추념사에서 “남북관계가 개선되면 비무장지대 유해 발굴을 우선적으로 추진하겠다”고 말했다. 문 대통령은 12일 북미 정상회담 후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의 통화에서 “북미가 합의한 미군의 유해 발굴 사업과 관련해 남북 사이에도 유해발굴 사업이 합의된 상태이기 때문에 남북미가 함께 공동으로 추진하는 것을 북한과 협의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비무장지대 유해 발굴은 지뢰 제거가 선행되어야 하므로 실행에 옮기기까지 상당한 시간이 소요되지만 북한 지역 내 발굴은 정치적 합의만 있으면 단기간 내 착수할 수 있다.

6.25 전쟁 기념일을 사흘 앞둔 22일, 충남 논산 육군훈련소를 찾은 참전용사들이 훈련병들의 박수를 받으며 입영심사대를 걸어가고 있다. 논산=연합뉴스
6.25 전쟁에 참전했으나 합당한 대우를 받지 못했던 소년소녀병의 명예를 지켜주는 일도 중요하다. 6.25 전쟁에 참여한 소년소녀병은 2만9614명이다. 이 가운데 2573명이 전사했다. 자원입대한 경우도 있지만 징집연령이 아닌 나이에도 강제징집된 사례가 적지 않다. 살아남은 소년병들 중에는 휴전 이후 병역의무 이행을 위해 두 번 군복무한 경우도 있다.

하지만 2011년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가 ‘6.25 전쟁 소년병 연구’를 발간하기 전까지 소년소녀병은 존재 자체를 인정받지 못했다. 보훈차원에서 보상을 하거나 예우를 강화하는 방안을 검토할 필요가 있다는 지적이 일면서, 16~19대 국회에서 4차례에 걸쳐 의원 입법 형태로 보상 법안이 발의됐으나 폐기됐다. 20대 국회에서도 재발의됐지만 통과가 불투명하다. 생존한 소년소녀병 대부분이 고령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법안 통과를 서둘러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6.25 유산 ‘획일주의, 생존 DNA’ 없애야 진짜 종전

우리 사회가 일본 식민지배를 벗어나 진정한 시민사회로 나아갈 기회를 빼앗은 6.25 전쟁은 획일화된 이데올로기와 천민 자본주의, 소수자에 대한 억압 등 숱한 부작용을 낳았다.

1953년 휴전 직후 우리 사회는 반공 이데올로기와 법을 넘어선 억압이 수십년간 이어졌다. 6.25 전쟁 당시 전장에서 통용됐던 ‘적 아니면 아군’이라는 이분법까지 가세하면서 민주주의 덕목인 다양성이 실종됐다. 1950년대 민주적 평화통일을 외치며 사회민주주의를 주장했던 조봉암이 간첩죄로 처형된 사건이 대표적이다. 조봉암은 2011년 대법원 판결을 통해 복권됐다.

판문점 공동경비구역 남측 지역에서 우리측 경비병들이 경계를 서고 있다. 게티이미지
5.16 군사 쿠데타는 우리 사회에서 ‘다른 의견을 말할 권리’를 억압한 결정적 계기를 만들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일반적으로 법은 강자나 기득권층의 논리를 담는다. 이에 대응해 민주주의는 사회적 약자나 소수자가 자신의 의견을 제시하고 관철할 수 있도록 표현, 집회, 결사의 자유를 보장하고 있다. 군사정권은 ‘안보위기 극복을 위한 국민총화’를 명분으로 이같은 자유를 억압했다. 그 결과 소수에 대한 다수의 존중이라는 전제 하에 성립된 다수결 원칙은 소수를 배려하지 않은 채 다수의 뜻만 강조되는 획일적 이데올로기로 변질됐다.

1987년 6월 항쟁과 촛불 혁명 등으로 제도적으로 다양성을 보장하는 것은 정착되는 분위기다. 하지만 온라인을 비롯한 사회 곳곳에서는 사회적 약자나 소수자에게 사회 주류의 의견을 강요하거나 조롱하는 방식에 의한 획일적 이데올로기가 여전하다. “6.25 전쟁 때 고생했는데도 받은 게 없는데 무엇을 더 요구하느냐”는 군사정권 시절의 심리가 획일적 이데올로기와 결합하고, 온라인의 익명성이 더해지면서 벌어진 결과라는 지적이다. 약자가 처한 현실을 이해하고 공감하는 것은 6.25 전쟁의 유산인 획일적 이데올로기로 대표되는 ‘우리 안의 파시즘’을 없애는 첫 걸음이다.

서울 용산 소재 전쟁기념관에는 6.25 전쟁 전사자를 추모하는 시설들이 들어서 있다. 주한미군 제공
6.25 전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았던 ‘생존 DNA’를 지우는 작업도 필요하다. “나부터 살고 보자”는 의식은 치열한 생존 경쟁을 낳았고, 이는 돈을 버는 것이 최고의 덕목인 물질 만능주의로 이어졌다. 그 결과 부(富)는 특정 계층에 집중됐고, 경제질서를 어지럽히는 각종 불법, 탈법 행위들이 ‘경제활동’으로 포장되어 버젓이 벌어졌지만 그것을 문제삼기보다는 선망의 대상으로 바라보는 일이 적지 않았다. 무조건적인 이윤 추구를 당연한 일로 보고 부러워하는 대신, 자본주의에 윤리를 더해 ‘인간의 얼굴을 한 자본주의’를 만들어야 할 때다.

남북 화해 분위기가 고조되면서 6.25 전쟁을 기념하는 행사는 상대적으로 조명을 받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가 이 땅에서 살아갈 수 있는 것은 6.25 전쟁에 참전해 목숨을 걸고 싸웠던 분들의 희생과 헌신 덕분이다. 비록 유해조차 찾지 못한 분들이 많지만, 우리가 그분들을 기억하는 한 나라를 위해 희생하고 헌신하신 분들은 영원히 살아있다. 사람은 생명이 다함으로서 죽는 것이 아닌, 살아있는 사람들의 기억에서 잊혀질 때 죽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분들을 기리면서 6.25 전쟁이 남긴 사회적 부작용들을 없애는 작업을 마칠 때, 그때가 바로 6.25 전쟁이 진정으로 끝나는 종전선언의 첫날이 될 수 있다.

박수찬 기자 psc@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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