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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완식이 만난 사람] 그릇에 담은 ‘텅빈 충만’… 보이지 않는 것 시각화 매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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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8-06-18 20:57:14 수정 : 2018-06-18 20:5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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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없음’의 시공간 그리는 이동수 작가 / 스님에 차 배운 것이 그릇그림과 인연 / 열번 정도 밑칠하고 갈아내기 작업 반복 / “표피서 느껴지는 파도는 영겁의 시간” / 해외아트페어 출품 5전6기 끝에 ‘대박’/ 고서·거문고·옛 기와 등으로 소재 확장 / 최근엔 中 상하이예술특구서 초대전도  별이 쏟아지는 밤이다. 작가는 온몸으로 하늘에 빠져든다. 시원의 영겁의 시간 속으로 별들과 시공간 여행을 떠난다. 지금 여기, 이 순간은 찰나가 되어 증발해 버린다. 온전히 우주와 마주하는 순간이다. 왠지 모든 것이 허허로워 보이지만 가슴 가득 충만감이 밀려온다. 동해바다 인근 작업실에서 붓으로 씨름하고 있는 이동수(54) 작가의 ‘화폭 농사’ 풍경이다.

작업실 앞으로는 양양 선사유적박물관이 보인다. 신석기인들이 살았던 호수 지역의 흔적이 습지로 고스란히 보전된 곳이다. 작가는 종종 유물관을 찾아 당시의 토기들과 대면도 한다. 뒷산은 작가의 선영이 자리하고 있다. 
강원 양양 오산리 선사유적박물관 늪지대 앞에 선 이동수 작가. 그는 “찰나의 삶을 살아가는 우리는 축적된 시공간에서 근원의 소리를 듣게 된다”고 말했다.

“나를 존재하게 만든 축적된 시간들이 쌓여 있는 곳이다. 무수한 시간의 비늘이 한 덩어리가 되어 내가 되고, 그리고 흘러가고 있다. 다만 나는 그것들을 잡아내려 할 뿐이다.”

그는 시간성을 함축해내기 위해 색들을 축적해 나간다. 열번에 가까운 밑칠 작업은 칠하고 갈아내는 작업의 반복이다. 형상도 같은 방식으로 구축해 나간다.

배경색도 얼핏 단순한 검은색으로 보이지만, 시간이 갈수록 묘한 끌림과 아련한 깊이가 느껴진다. 형상의 표피에선 파도의 파동이 느껴진다. 무한 시간성의 반복이다. 파도 결들이 영겁의 시간을 잡아내고 있는 것이다. 보이지 않는 것을 시각화하기 위한 노력들이다. 우주(생명)의 숨결과 공명하기 위한 의식이라 할 수 있다. “작가에게 생명이나 시간 같은 잡을 수 없는 것들은 매력의 대상이다.”

색으로 집적해낸 그의 고요한 그림에선 시공간과 감성이 흐르고 있다.

언뜻 보면 우주 공간에서 이름 모를 행성이 서서히 얼굴을 드러내고 있는 모습이다. 청회색 바탕색이 시원의 우주색을 연출하고 있기 때문이다. 형상은 그릇이지만 그릇이 아니다. 다만 ‘텅빈 충만’을 그리는 수단으로 그릇의 형상을 빌려왔을 뿐이다. 그릇이 쓰임새가 있기 위한 텅 빔 같은 것이다. 수평 붓질 자극은 시간의 흐름을 극대화시킨다.

“적막하고 고요하지만 시공간의 흐름이 감지되는 풍경이었으면 한다.” 

‘흐르는 그릇’
예술의 오묘한 경지는 형상 너머로 미묘한 향기가 넘쳐 흐르는 세계에 있다. 시가 언어 너머에 있는 의미를 머금어야 하는 이치와 같다. 그러기에 옛날부터 뛰어난 화가라면 표현할 수 없는 것에 대해 고심해야 하며 표현할 수 없는 것을 표현해야 미묘한 신운을 얻을 수 있다고 했다.

“10여년 전 고향에 내려와 뭘 그려야 하나 고민했다. 어느 날 새벽 차를 마시고 들고 있던 다완을 손가락으로 돌려가며 생각에 잠겨 있을 때 전광석화처럼 ‘그림으로 그리면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몰아쳤다. 감각적으로 다가왔다.”

그는 자주 늪지와 소나무가 우거진 야트막한 동산의 숲길을 산책하고 10여분 걸어가 바다를 만난다. 서울에서 대학원만 졸업하면 희망이 보일 것 같았지만 절망만 안고 돌아온 고향이 준 선물이다.

“살아서 뭐 하나 했지만 아내와 아이가 존재이유가 됐던 시절이었다. 호구지책으로 화실도 운영하고 아내도 아동미술로 힘을 보탰다. 그림을 배우러 오신 스님으로 부터 차를 배운 것이 그릇을 그리는 인연으로 이어졌다. 세상만사, 우주의 모든 것이 그렇게 연결돼 있는 것이다.”

그는 아내에게 5년만 시간을 달라고 했다. 화실이 끝나면 그림에 매달렸다. 그릇 그림이 4년의 시간 속에 모습을 드러냈다. 객관적인 평가를 받고 싶어 해외 아트페어에 잇달아 출품했다.

“다섯 번의 기회를 가졌지만 성과가 없었다. 귀국길에 태평양 바다에라도 뛰어들고 싶은 심정이었다. 반응이 조금씩 오고 있는 것을 느껴서 집을 담보로 또 한번 도전했다. 그동안 아내 모르게 사채도 써 빚 독촉에 시달리고 있는 상황이라 붓을 꺾을까 생각도 해봤다.”

그는 여섯 번의 시도에서 대박을 터뜨렸다. 작품이 모두 팔려나간 것이다.

“누가 시켜서 다 사간 것 같은 기적이었다. 그동안 한 달에 몇 십만원씩 후원해 준 고향 분들이 있었기에 버틴 세월이었다. 속초 현대치과 원창덕 원장도 그중 한 분이다. 이십여 분이 그렇게 도와주셨다.”

그는 컴퓨터그래픽도 해 봤다. 단순하고 메마른 시각정보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을 깨닫게 해 준 시간이었다.

“너무 차가워 감성 교감이 안 되는 것을 체험했다. 호흡이 느껴지고 땀과 숨결이 밴 회화에 더 매진하게 되는 계기가 됐다.”

그는 고서와 거문고, 옛 기와 등으로 소재를 확장해 나가고 있다. 모두가 시간을 머금고 있는 것들이다. 그것들의 축적된 시공간을 찰나 속에 펼쳐내고 있는 것이다. 순간 속에 영원을 담아낸다 할 수 있다. 시간을 머금은 기물들의 아우라를 현대미술의 색공간 연출을 통해 드러내고 있음이다.

“기와는 켜켜이 쌓인 시간처럼 화폭에 축적시켰다. 한옥의 직선과 곡선이 오버랩 되면서 형상 너머의 본질, 멈춰놓을 수 없는 시공간으로 빠져들었다.”

그는 최근 중국의 호출을 받았다. 20일까지 상하이예술특구인 모간산로 ‘더허(德荷)당대예술센터’에서 초대전이 열리고 있다. 작품은 이미 모두 팔린 상태다. 내년 6월엔 유럽문화센터의 지원을 받는 GAA재단이 마련하는 베니스비엔날레 특별전에도 초대를 받았다. 전시는 베니스 시내 팔라초 모라에서 열릴 예정이다.

“나는 검정톤 무채색의 저채도를 견지하고 있다. 흑백 수묵화 세계와 조우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노자는 완전한 흰색은 검은 것처럼 보인다고 했다. 완전히 텅 빈 곳에 최고의 충실감이 있다는 얘기다. 여백의 신령스러운 기운 같은 것이다.”

아마도 노자의 도허(道虛)가 이런 것일 게다. 서른개의 바큇살이 하나의 텅 빈 바퀴통에 모여 수레로서 쓰임이 있는 것처럼, 집 창문이 방으로의 쓰임을 만들듯 있음의 유익함은 없음의 작용에서 나오는 것이다. 이동수 작가는 오늘도 그 ‘없음’을 그려내려 한다. 예술가의 숙명이다.

“나는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을 그림으로 그리고 싶다. 그림을 그릴 때는 형상과 관념과 언어마저 잊으려 한다. 그래야 비로소 그림쟁이가 되는 것 같다.”

그는 여전히 회화의 가능성을 믿는다. 회화가 시각적 감수성을 버리고 사변으로 달아나버리면 회화는 끝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흥미로워하는 것들에 심미적 관심을 기울일 때 그릴 것이 얼굴을 비로소 내밀게 된다. 나만의 예술론을 쓰기보다 나만의 구체적인 감각의 경험에 충실하려 한다. 그것이 바로 나만의 사유다.”

그는 개인의 심미적 감성이 아닌 언설에 의존하고, 한 시대를 지배하는 예술개념에 자신을 맡기려 하지 않는다. 예술가 개개인의 취향 대신 현대성에 대한 해설만 존재라는 미술계에 대한 단호한 거부의 몸짓이다. 그가 서울을 떠나 고향에 머물고 있는 강한 이유다.

객원미술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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