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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대 위에선 숨 쉬는 것조차 표현”

입력 : 2018-06-10 20:59:30 수정 : 2018-06-10 20:5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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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24일 ‘안나 카레니나’ 공연/ 국립발레단 수석무용수 박슬기
지난해 11월 국립발레단 ‘안나 카레니나’ 초연 무대. 사랑 때문에 파멸한 안나가 죽어가고 있었다. 화려함도 웃음도 사라진 지 오래였다. 슬픔과 절망에 지친 안나는 천천히 걷다 이내 무너져 내렸다. 무서운 집중력이 공연장을 압도했다. 관객의 눈은 무대에 못 박힌 듯 고정됐고, 안나의 비탄에 공명했다. 안나를 연기한 이는 국립발레단 수석무용수 박슬기(32). 막이 내리자 ‘역시 박슬기’라는 감탄이 나왔다. 그만큼 ‘안나의 죽음’은 깊은 인상을 남겼다.

박슬기가 다시 안나 카레니나로 분한다. 제8회 대한민국 발레축제 프로그램의 하나로, 오는 22~24일 서울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에서 이 작품을 공연한다. 8일 예술의전당 국립단체 연습동에서 그를 만났다. 초연 당시 인상을 들은 박슬기는 멋쩍게 웃었다. ‘안나 카레니나’는 스위스 취리히발레단 예술감독 크리스티안 슈푹의 2014년 안무작이다. 톨스토이 소설을 춤으로 만들고 라흐마니노프와 현대작곡가 비톨트 루토스와프스키의 음악을 입혔다. 안무가 슈푹은 이 작품에서 이야기와 감정의 흐름에 특히 초점을 맞췄다. 지난해 연습 때도 ‘우리는 발레가 아니라 연극·연기를 하는 것’임을 강조했다. 안나가 죽는 대목도 마치 연극 같다. 현란하게 뛰고 도는 춤 하나 없이, 그저 걷다가 스러진다. 박슬기는 “그런 만큼 어떻게 걸어야 감정이 전달될까 고민했다”고 말했다.

발레 ‘안나 카레니나’의 주역을 맡은 박슬기는 “모든 걸 잃은 안나는 감정이 북받치는데도 계속 품위를 유지한다”며 “슬픔을 발산하기보다 속으로 누르고 걸어갈 때도 레이디로서 품위를 잃지 않으려 하는데, 저도 이런 점을 신경쓰고 있다”고 말했다.
이재문 기자
“제가 안나의 마음에 들어가지 못하면 관객이 아무것도 느낄 수 없으리라 봤어요. 내게 남은 게 전혀 없는 절망감도 앉아있는 자세만으로 표현해야 하거든요. 남편, 사랑하는 남자 다 떠나고 자식도 못 보는 상황을요.”

그가 택한 방법은 ‘나만의 이야기 만들기’였다. 발레리나들은 춤출 때 자신만의 대사를 떠올리며 표현력을 끌어올리곤 한다. 세상에서 내쳐져 홀로 된 안나가 반쯤 정신이 나가 무도회 환영을 보곤 ‘난 지금 파티를 즐기고 있어’라고 속으로 말하는 식이다. 여기에 더해 그는 눈짓 하나, 손끝 방향까지 고심했다. “무대에서 하는 모든 움직임이 무용이고, 숨 쉬는 것조차 이야기 전달의 도구”이기 때문이다.

“보통 회상할 때 ‘뭐였지’ 하며 위를 봐요. ‘그때 그랬는데’ 할 때도 사람들이 보이는 눈빛, 시선의 각도가 있죠. 절망에 빠지면 터벅터벅 걷잖아요. 그런데 안나는 죽으러 갈 때 절망보다 더 나간 감정이었어요. 모든 걸 다 내려놨죠. 다 내려놓고 공허하다면, 구름 위를 걷듯 아무 저항도 받지 않고 걸어야 그 심정이 보일 것 같았어요.”

이런 노력 때문일까. 박슬기는 최근 국립발레단 무대에서 유독 눈에 띈다. 탄탄한 동작 위에 우아함과 표현력이 더해져 ‘믿고 보는 무용수’로 자리 잡았다. 그는 “춤의 깊이가 더 생기지 않았나 싶다”고 말했다. “강수진 단장님이 감정 표현을 강조하시는데, 마침 저도 이를 받아들일 준비가 됐던 것 같다”며 “감정을 몸으로 전달하는 데 있어 생각이 깊어진 것 같다”고 했다.

지난해 발레 ‘안나 카레니나’ 공연 모습.
국립발레단 제공
“어린 친구들을 보고 있으면, 그런 차이인 것 같아요. 저도 예전에는 동작 자체에 치중했다면, 이제는 그 동작으로 어떤 뜻을 전달해야 하나 생각해요. 지금은 전막 발레를 이끄는 주역으로 무대에 서니까요. 그래서인지 저도 변화를 느껴요.”

그가 성장을 실감한 건 2년 전쯤이었다. 2012년 ‘스파르타쿠스’의 예기나를 연기한 그는 2016년 같은 역을 하게 됐다. 원작의 해외 트레이너들이 안무 지도를 위해 한국을 찾았다. 박슬기는 “옛날에도 나름대로 캐릭터와 이야기를 생각하며 한다 했는데 다시 지도 받아보니 ‘아, 이건 이렇게 했어야 했구나’하고 많이 배웠다”고 떠올렸다.

“그러고 나니 춤추는 재미도 더 생겼어요. 예전에는 뭘 표현하고 싶은지조차 잘 몰랐다면, 지금은 표현해내고 싶은 게 많아졌어요. 해보고 싶은 작품이요? 이미 한 작품이지만 장 크리스토프 마이요의 ‘로미오와 줄리엣’이요. 연습할 때 피아니스트 선생님들이 이 음악을 연주해주면 다시 해보고 싶어져요.”

그는 최근 춤뿐 아니라 안무에도 도전하고 있다. 오는 8월 국립발레단 무브먼트 시리즈를 통해 두 번째 안무작을 선보인다. 제목은 ‘스몸비’. 하루종일 스마트폰을 놓지 않고 소셜미디어에 포박당한 현대인들을 표현하려 한다. 그는 “안무에 재능 있는 친구들을 보면 떡잎부터 다른데 저는 사실 큰 관심은 없다”며 “그래도 나름의 생각, 표현하고 싶은 게 있다 보니 계속 도전하게 된다”고 말했다.

송은아 기자 sea@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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