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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연국칼럼] 머리는 차갑게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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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8-06-07 21:50:03 수정 : 2018-06-07 21:5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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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미 대화하는 김정은 속셈은 / 평화보다는 김씨 왕조체제 강화 / 남북 교류하더라도 北 본심 알아야 / 국가가 위험에 빠지는 일 없을 것 벌써 달포 전의 일이다. 4·27 판문점 회담 때 서울 강남의 50대 아주머니가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군사분계선을 내려오는 모습을 TV로 보고는 눈물을 흘렸다. “분단선이 높지도 않은데 많은 사람들이 밟고 지나다 보면 없어지지 않겠습니까?” 김정은의 이 말에 그녀를 짓누르던 전쟁의 불안감이 눈 녹듯 사라졌다고 한다. 북한 정권에 적대적인 최고 부촌에서 생긴 일이라고는 믿기지 않겠지만 사실이다.

남북의 지도자가 나란히 분단의 선을 넘는 모습은 감동적인 장면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진실은 대개 무대 뒤쪽에 있다. 김정은이 분단의 아픔을 어루만지던 그 순간에도 북녘에선 많은 사람들이 철조망에 갇혀 신음하고 있었다. 김정은은 현지지도를 다녀왔던 양식장에서 새끼 자라가 죽자 평양으로 돌아가던 차 안에서 “죽여!”라고 지시했다. 그로부터 1시간도 지나지 않아 양식장 책임자는 총살을 당했다. 자라보다 못한 사람 목숨이었다. 그런 독재자가 비핵화와 평화를 입에 올린다. 그의 진짜 본심은 무엇일까.

배연국 논설실장
사람의 진심을 파악하기란 쉽지 않다. 얼굴이나 언행으로는 잘 가늠이 되지 않는다. 범죄형 얼굴이 따로 없고, 사기꾼일수록 말이 현란한 법이다. 마치 독버섯이 더 화려한 색깔을 뽐내는 것처럼. 성인 공자는 이런 난제에 명쾌한 해답을 우리에게 제시한다.

“그가 하는 행동을 보고, 왜 하는지 살피고, 무엇을 좋아하는지를 관찰하면 어떻게 자기를 숨기겠는가?” 공자의 판별법은 세 가지로 요약된다. 우선 말이 아니라 행동을 주시하라는 것이다. 겉이 화려하거나 달콤한 말일수록 거짓인 경우가 더 많기 때문이다. 다음으로는 무슨 연유로 그런 행동을 했는지 동기를 살피라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그가 무엇을 편하고 기쁘게 여기는지 눈여겨보라는 것이다. 행동의 동기와 기뻐하는 일을 자세히 살피면 아무리 위장하더라도 본심을 파악할 수 있다는 가르침이다.

공자의 공식을 북한에 대입한다면 김정은의 의중이 훤히 드러난다. 자신의 인민을 억압하고 마음대로 죽이는 잔인한 독재자가 세계 평화를 걱정할 리 만무하다. 그는 권력을 좋아하고 그것을 휘두를 때 기쁨을 느낀다. 12일 북·미 정상회담에 나오는 동기는 김씨 권력의 강화이고, 핵은 세습왕조를 지키는 핵심이다. 그런 만큼 그가 핵을 완전히 폐기하기보다는 일부를 숨긴 뒤 비핵화로 포장할 공산이 훨씬 크다.

사람의 본심은 입이 아니라 흉중에 있다. 그러나 대중의 이목은 내면의 동기보다는 겉으로 보이는 언행을 쫓는다. 그럴싸한 말로 둘러대면 절반이 속고 친절한 행동까지 하면 십중팔구 속아 넘어간다. 판문점 1차 정상회담 후 여론조사를 했더니 김정은을 신뢰한다는 국민이 77.5%에 달했다고 한다. 예전에 북한을 믿는다는 사람은 14.7%였다. 사람의 판단이 외양에 얼마나 쉽게 흔들리는지 보여준다.

상대의 숨은 동기를 알지 못하면 국가는 위험에 처한다. 눈에 보이는 것을 진실로 믿다가 재앙을 당한 사례는 수두룩하다. 히틀러의 말에 속은 유럽이 그러했고, 금나라에 황금을 바친 송나라 평화주의자들이 그랬다. 돈으로 평화를 구걸한 송은 2년 후 금의 침공을 받아 황제가 죽고 백성은 노예로 전락했다.

자유민주주의는 인류가 고안한 최고의 정치 발명품이지만 국가 안보에는 치명적인 약점이 있다. 개인의 자유와 소유를 중시하다 보니 안보라는 공동체 이익엔 허약하다. 국가관을 주입하는 전체주의의 공격에 자유 국가들이 맥없이 무너지는 이유다. 무엇보다 다수의 대중이 인기나 분위기에 휩쓸려 잘못 판단하는 위험이 상존한다. 설혹 공동체에 해가 될지라도 과반수가 찬성하면 정책으로 채택될 수밖에 없다. 안보는 그렇지 않다. 50%가 아니라 99%라도 위험하다. 국민의 생명과 직결된 문제는 단 1%의 빈틈도 없어야 하기 때문이다.

현존하는 위험을 줄이기 위한 남북대화는 계속돼야 한다. 그러나 김정은의 입을 믿어선 안 된다. 강남 아주머니가 흘린 눈물의 선의는 가슴에 간직하되, 머리는 차갑게 하자. 거짓된 평화는 전쟁보다 위험하다.

배연국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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