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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슈&현장] 재개발 세입자 주거이전비 둘러싸고…‘청량리588’ 다시 시끌

입력 : 2018-06-03 18:31:31 수정 : 2018-06-03 18:3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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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개발 이주 1년 만에 한데 모여 / 공정한 주거이전비 재집행 촉구 / “고령에 법 몰라 푼돈 받았다” / ‘버티기’로 수억 받기도…“불공평” / “국민들 편견 거두고 지지 바라”
‘청량리 588’

도시의 은밀한 욕망이 몰려들던 서울 동대문구 전농동 일대를 사람들은 오랫동안 이렇게 불렀다. 수년 전 이곳이 재개발된다는 소식에 사람들은 환호했다. ‘집 값 상승’, ‘이미지 변신’ 등 기대감도 숨김없이 드러났다. 눈엣가시였던 ‘집창촌 정비’란 명분은 재개발 사업이 지닌 딜레마를 손쉽게 희석했다. 수십년 삶의 터전을 하루아침에 내주어야 했던 사람들의 입을 막는 데에도 안성맞춤이었다.

김순복(77·가명), 이정애(76·가명) 할머니는 지난해 수십년 동안 세들어 살던 쪽방촌을 떠나야만 했다. 두 할머니가 40여년 동안 살던 전농동의 쪽방촌은 이른바 ‘청량리588 재개발 계획’에 포함된 곳이었다. 건장한 체구의 장정들이 수시로 드나들고 본격적인 강제 이주가 시작되자 이들은 마지못해 터전을 내줄 수밖에 없었다. 두 사람이 주거이전비로 손에 쥔 돈은 200만원과 680만원. 그나마 “임대아파트 입주권을 주겠다”는 제안을 위안 삼았다.

그렇게 1년이 흘렀지만 이들은 임대아파트 입주권은커녕 주변 사람들이 거액의 이주비를 받은 사실만 알게 됐다. 끝까지 버티던 일부 세입자 중에는 수억원을 받아낸 사람도 있었다. 자신들이 받은 돈이 법으로 보장되는 최소한의 이주비에도 한참 모자란다는 사실도 뒤늦게서야 알게 됐다고 한다. 수십년 보금자리를 내준 대가는 뼈아팠다.

최근 두 할머니를 포함해 청량리 4구역 재개발 과정에서 주거이전비를 불공정하게 지급받은 사실을 알게 된 세입자들이 집단 행동에 나서고 있어 눈길을 끌고 있다. 성매매업 종사자 등도 일부 포함돼 있지만 대부분은 재개발 지역 인근에 살던 평범한 사람들인 것으로 알려졌다.

더구나 세입자들을 쫓아내던 폭력조직이 법원으로부터 유죄 판결을 받으면서 주거이전비 관련 대책이 필요하다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고령에 법 몰라…푼돈 받고 이주해”

2일 경찰 등에 따르면 ‘청량리588 보상 대책위원회’(이하 대책위)는 청량리 4구역 재개발 시공사인 L건설 등에 “이주과정에 조폭이 개입하는 등 주거이전비가 불공정하게 책정됐다”며 지난 4월부터 이틀에 한번 꼴로 집회를 이어가고 있다. 대책위는 주거이전비를 한 푼 받지 못한 경우부터 작게는 100만원에서 많게는 1000만원 안팎을 받은 세입자 120여명이 모인 단체로 알려졌다.

현행법에 따르면 재개발 사업 고시 3개월 이전부터 재개발 지역에 거주한 세입자는 도시근로가구의 월평균 가계지출비에 따라 주거이전비를 받을 수 있다. 지난해 기준 1인 가구(731만원)부터 4인 가구(1757만원) 등 가구원 수에 따라 지급액이 달리 산정된다. 이 돈은 공익사업지구 내 살고 있는 세입자들의 조기 이주를 장려하고 사업추진을 원활하게 하려는 목적으로 지급되는 것이다.

법이 엄연히 존재하지만 세입자의 주거이전비를 둘러싼 갈등은 끊이지 않고 있다. 그간의 재개발 사업들을 살펴보면 세입자들을 내쫓기 위해 ‘용역 회사’들이 무력으로 개입하는 일이 적지 않고, 고령이나 장애가 있는 세입자들이 법적으로 정해진 돈마저 받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배째라’ 식으로 버티는 사람들에게 웃돈을 얹어주는 등 주먹구구식 관행도 갈등을 부채질하는 요인이다.

대책위 관계자는 “법을 몰라서 혹은 주변 등살에 푼돈을 받고 나간 ‘토박이’들이 적지 않은 상황”이라며 “상식적인 수준의 주거이전비가 지급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심교언 건국대 교수(부동산학)는 “상대적 박탈감을 부르는 형평성 없는 보상비 지급은 재개발 사업에서 흔히 나타나는 고질적인 문제”라고 지적했다.

◆“근거 없어”VS“무책임” 시각차 여전

이 지역 재개발 추진위원회(추진위)도 할 말은 있다. 즉 “이미 합의한 일에 왜 뒤늦게 문제제기를 하느냐”는 거다. 추진위는 또 현재 시위에 나선 사람 대부분을 ‘비대책 세입자’로 파악하고 “문제 없다”는 입장을 고수하는 중이다. 보증금 없이 월세만 내는 ‘달방’이나 고시원 투숙객, 불법 성매매업 종사자, 재개발 사업 고시 이후 들어간 세입자 등 비대책 세입자들은 주거이전비를 받을 법적 근거가 마땅히 없다.

그러나 대책위는 일부 비대책 세입자도 섞여 있지만 현재 집회에 참가하고 있는 사람 중 절반가량이 법적으로 보호받을 수 있는 ‘대책 세입자’들이란 입장이다. 이들은 또 주거이전비 지급 과정에서의 불공정성을 지적하는데 추진위가 비대책 세입자 여부를 끌어들이는 것은 사실상 ‘물타기’나 다름없다고 지적하고 있다.

설령 비대책 세입자더라도 오랜 기간 월세를 내고 살면서 취사와 빨래 등 일상생활을 한 경우 일반적인 세입자와 동등한 수준의 주거이전비와 이사비를 지급해야한다는 행정법원 판례도 있다. 쪽방촌이나 달방(여인숙) 투숙객이더라도 사실상 주거의 목적이었다면 보호해야한다는 취지다.

추진위 측 설명과 달리 비대책 세입자에게 2억여원을 지급한 사례가 뒤늦게 알려진 점도 대책위가 목소리를 높이는 이유다. 대책 세입자와 비교하더라도 훨씬 큰 돈을 준 셈인데, 악착같이 버티면 큰 돈을 주고 순순히 나가면 한 푼 주지 않거나 싼 값에 ‘후려치는’ 등 공정성 문제가 사안의 본질이라는 게 이들의 주장이다.

추진위 관계자는 “해당 인사가 온 몸에 휘발유를 뿌리고 건물에 불을 내겠다고 하는 등 강경하게 버텨 어쩔 수 없는 부분이 있었다”며 “사업 지연으로 드는 비용과 비교했을 때 웃돈을 주더라도 서둘러 나가게 하는 것이 맞다고 판단한 것”이라고 해명했다.

◆‘이권 개입’ 세입자 내쫓던 조폭들 징역형

또다른 속사정도 있다. 대책위 측은 시공사인 L건설 등에 “추가 이전비를 달라”고 요구하고 있지만 정작 이전비를 지급한 곳은 공동시행사였던 S건설사란 곳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S건설사는 폭력조직이 만든 회사인 것으로 드러났고, 이들의 범행이 검찰에 발각되면서 관련 서류를 모두 압수당했다. 관련 서류들이 남아는 있는지, 범행을 위해 조작된 것은 아닌지 전혀 알 수 없는 상황인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해 12월 검찰은 S건설사를 차린 ‘신청량리파’ 두목 김모(66)씨 등을 배임수재·횡령 등 혐의로 구속기소했고 지난 1일 법원은 김씨에게 징역 10년에 추징금 6억3070만원을 선고했다. 2004년부터 청량리 일대를 장악한 뒤 성매매 업자들로부터 상납금을 받아오던 김씨 일당은 재개발 사업이 진행되자 S건설사를 직접 설립해 이권에 뛰어든 것으로 드러났다.

이들은 추진위로 하여금 S건설에 철거용역을 주도록 만든 뒤 받은 수십억원의 회삿돈을 가로챘고, 보상비 지급 과정에서도 1개 업소를 여러 개로 속이는 ‘쪼개기’ 수법으로 업소당 4000만∼1억원의 허위 보상금을 챙긴 것으로 나타났다.

추진위 관계자는 “형평성 문제가 있다는 것은 일정 부분 공감한다”면서도 “주거이전비 지급을 재검토하기 위해서는 누가 어떤 이유로 얼마를 받았는지 알아야 하는데 현재로선 확인이 불가능한 상황”이라고 털어놨다.

◆“평범한 이웃의 이야기…편견 거둬 달라”

세입자들의 이주를 담당하던 이들의 각종 불법행위가 검찰 수사를 통해 드러나면서 일각에서는 보상비 관련 대책이 새롭게 마련돼야한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 재개발 추진위와 세입자 측 모두 서로의 입장을 ‘모르쇠’로 일관하기보다 시각차를 좁히려는 시도라도 있어야 하는 것 아니냐는 목소리도 나온다.

‘대부분 성매매업 종사자’라고 알려진 것과 달리 120여명으로 구성된 대책위에 근처 아파트와 쪽방촌, 다세대주택에 살던 세입자가 80여명으로 가장 많다는 점도 추진위 측이 감안해야 할 부분이란 지적이다.

인근 쪽방촌에 살다 이주한 최모(41)씨는 “언론에는 우리가 성매매 업자들의 모임으로 알려졌지만 집회에 참가하는 사람들 대부분이 고령의 할머니들”이라며 “누구든 집회 현장에 와 보면 실상을 아실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대책위에서 위원장을 맡고 있는 안광모(67)씨는 “재개발 문제는 누구나 겪을 수 있는 평범한 이웃들의 이야기”라며 “사람들이 편견 없이 바라봐 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글·사진=김청윤 기자 pro-verb@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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