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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정근의인문상식] 위선을 막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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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8-06-01 21:09:16 수정 : 2018-06-01 21:0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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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에서의 선악은 복합적 특성 지녀/ 선으로 가려는지 끊임없이 되물어야 윤리학의 과제는 간단하다. 세상에서 악을 줄이고 선을 늘리는 것이다. 근본주의 입장에서 접근하면 윤리학은 세상에서 악을 없애고 선을 가득 차게 해야 한다. 윤리학과 현실이 만나면 복잡해지기 시작한다. 이론 차원에서 선과 악이 나뉘는 경계가 선명해 결코 혼돈이 일어나지 않는다.

장기간 지속돼온 국제분쟁을 전쟁과 평화 중 어떤 방식으로 해결할까라는 문제가 있다고 하자. 추상적으로 따지면 전쟁이 악이고 평화가 선에 해당되는 방식으로 보인다. 전쟁은 승패를 떠나 나와 상대에게 심각한 피해와 회복할 수 없는 상처를 주기 때문이다. 하지만 상대가 전쟁의 고통을 피하려는 나의 의도를 이용해 터무니없는 양보를 주장한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여전히 평화를 지지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전쟁도 고려할 수 있다며 입장의 변화를 모색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 이처럼 현실에서 선과 악은 칼로 자르듯이 확연히 나뉘지 않는 애매성과 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는 재량권이 작용되는 복합적 특성을 지닌다.

신정근 성균관대 교수 동양철학
현실에서 선악은 개념의 정의만이 아니라 사람 자체 때문에 복잡 미묘하기 그지없다. 선악은 개념의 이해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실천으로 옮겨야 한다. 실천은 결국 사람이 할 수밖에 없다. 사람이 선악을 행동으로 옮길 때 두 측면에서 새로운 문제가 생긴다. 의지의 강도와 순수 여부이다. 사람이 선을 지향하고 악을 회피한다고 하더라도 의지의 강도가 약하면 선은 늘어나지 않고 악은 줄어들지 않는다. 이것은 ‘안다고 해서 다 행하는 것이 아니다’는 말처럼 흔히 언행의 불일치나 지행의 불일치로 인간의 나약성을 표현하고 있다. 인류의 역사를 전체적으로 보면 선을 실천하는 사람이 많기에 인간 공동체는 느리게 진보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또 의지의 순도가 다양하게 나타날 수 있다. 공동의 선과 개인의 의지가 완전히 일체되는 거룩하고 성스러운 사람도 있지만 사익을 추구하기 위해 불순한 동기를 가진 사람도 있다. 전자는 다른 사람이 함께 공유할 수 없다는 점에서 영웅적 특성을 갖는다. 후자는 언제라도 입장을 바꾸거나 다른 방향으로 돌변할 수 있는 위선의 특성을 갖는다. 위선은 나와 상대가 같은 자리에 있다고 하더라도 언제 자리를 박차고 나갈지 모르는 불안과 속이지 않을까라는 불신의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위선자는 선을 해야 한다거나 선을 하는 것처럼 보여야 하는 압박에 일시적으로 굴복해 있거나 선을 하는 것처럼 보이면 좋다는 전략에 따라 상대를 완전히 속여서 자신의 바라는 바를 거두려는 탁월한 연기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의지의 순도는 의지의 강도보다 위험하다. 약한 의지는 알고도 행하지 못해 문제이지만 ‘내’가 무엇이 문제인지 이미 알고 있다. 이러한 의지의 박약은 질병이나 교육이나 수양이나 다양한 차원에서 극복하려는 시도를 할 수가 있다. 반면 불순한 의지는 자리를 박차고 뛰쳐나가지 않거나 탁월하게 연기를 계속하고 있다면 확인할 길이 없다. 무슨 생각으로 같은 자리에 앉아 있는지 정체를 파악할 수가 없다. 위선에 속아 넘어가면 순진한 사람이 될 터이고 알아차리면 현명한 사람이다. 그렇다고 과거의 사례를 들어서 위선의 혐의를 자꾸 들추며 마주 않기를 거부한다면 문제의 해결을 방해하거나 상황의 고착을 바라는 사람이 된다.

인간이 신이라면 위선자가 세상에 발을 붙일 곳이 없다. 인간은 신적 지성을 갖지 않은 채 사람과 어울릴 수밖에 없다. 이때 우리가 위선의 연기에 쉽게 넘어가지 않으려면 끊임없이 되묻는 시험에 들 수밖에 없다. 선으로 끝까지 나아가려고 하는지 묻고, 도중에 이전 상황으로 되돌아가지 않을 것인지 묻고, 함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믿는지 물어서 ‘예’라는 대답을 들어야 한다. 대답을 하면 다음에 그 ‘예’를 바탕으로 또 물어야 한다. ‘예’의 대답에 미적거리거나 다른 말을 한다면 되묻는 시험을 통과하지 못하는 것이다. 끊임없이 되물으면 이전을 부정하지 않은 한 지금을 부정할 수 없다. 부정하지 않는 한 이전으로 돌아가는 퇴로를 막아 앞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다.

신정근 성균관대 교수 동양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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