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의 역사에는 여성 과학자가 차별을 받았던 사례가 수두룩하다. 18세기만 해도 여성 과학자는 동그란 네모와 같이 어울리지 않는 용어였다. 마리아 빙켈만은 베를린 과학아카데미에서 남편의 조수로 일해야 했으며, 남편이 죽은 뒤에는 아들의 조수가 돼야 했다. 라우라 바시는 여성 최초로 대학 교수가 됐지만 볼로냐대학이 바시에게 기대한 역할은 박식한 과학자가 아니라 행사가 열릴 때 관객을 끌기 위한 얼굴마담이었다. 소피 제르맹은 에콜 폴리테크닉의 수업을 청강하면서 자신이 여성이라는 사실을 숨기기 위해 르블랑이란 가명을 사용해야만 했다.
송성수 부산대 교수 한국과학기술학회 회장 |
마이트너가 세계 정상급 과학자로 성장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그녀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열심히 연구했으며, 수많은 어려움과 차별을 슬기롭게 극복했다. 마이트너의 열정과 노력을 매개로 주변의 남성 과학자들도 마이트너를 보는 시선을 바꾸면서 그녀를 이해하고 존중하는 자세를 보였다. 이러한 목록에는 1902년 노벨 화학상 수상자인 에밀 피셔와 1918년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인 막스 플랑크가 포함된다.
마이트너는 빈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후 1907년에 베를린대학의 물리학과 교수인 플랑크를 찾아갔다. 당시에 플랑크는 ‘자연이 여성에게 부여한 역할은 어머니와 아내가 전부’라는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마이트너의 학문적 열정에 깊은 인상을 받으면서 여성을 다른 각도에서 보기 시작했다. 플랑크는 자신의 이론물리학 강의에 마이트너의 등록을 허용했고, 조교 자리까지 마련해 주었다. 마이트너는 평생 동안 플랑크를 존경했으며, 플랑크는 여러 차례에 걸쳐 마이트너를 노벨상 후보로 추천했다.
한이 마이트너와 공동연구를 추진하려고 하자 베를린대학의 화학연구소 소장이던 피셔는 마이트너에게 까다로운 조건을 내걸었다. 그녀가 지하실에서 연구하고 어떤 경우라도 연구소 정문을 사용하지 않도록 했던 것이다. 심지어 화학연구소에는 여자 화장실이 없었기에 마이트너는 인근에 있는 음식점 화장실을 이용해야 했다. 그러나 한과 마이트너가 1년 만에 세 편의 논문을 발표하자 피셔의 태도는 달라졌다. 지하실의 연구공간을 확장해 주는가 하면 여성용 화장실도 마련해 주었던 것이다. 그 후로도 피셔는 힘 닿는 대로 마이트너와 한에 대한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마이트너의 사례는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면 옛날이야기이고 사소한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모든 것은 과거와 연결돼 있고 주변에서 시작되지 않는가. 마이트너의 사례를 가지고 요즘의 ‘미투’(Me Too·나도 당했다) 운동을 다시 생각해 볼 수도 있을 것 같다. 공평한 조사를 통해 부당하게 기울어진 운동장을 바로 세우는 일은 지속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이와 함께 남성과 여성이 서로 격려하면서 더욱 좋은 사회를 만드는 데 힘을 모으는 것도 필수적이다. 결국은 남녀를 불문하고 조화롭고 행복하게 사는 것이 우리의 과제가 아닌가.
송성수 부산대 교수 한국과학기술학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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