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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세상만사 품어 안은 江…시가 흐르는 섬진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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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8-05-25 10:00:00 수정 : 2018-05-23 20:5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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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택 시인의 고향’ 전북 임실
 
‘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 ‘동구 밖 과수원길 아카시아 꽃이 활짝 폈네∼.’

어디선가 들리는 동요에 맞춰 콧소리를 내거나 흥얼거리지만 자연스레 떠올라야 할 시골 풍경이 그려지지 않는다. 개울이 흐르고 그 주위가 연둣빛 신록과 짙은 초록잎으로 둘러싸인 봄의 풍광이 선명히 떠올라야 하는데 그러질 않는다. 어느새 도시에서의 삶이 너무나 익숙해진 듯하다.

어릴 때 머물던 고향이나 외가를 찾으면 마주하던 날것 그대로의 풍광이 그립지만 시나브로 사라져 버렸다. 흙먼지가 날리던 울퉁불퉁한 길은 포장돼 깔끔하게 닦이고, 휘휘 감아 돌던 강과 개울은 정비돼 반듯해졌다. 제멋대로 자라던 하천 주위 나무들은 줄 맞춰 곧게 서 있어 보기엔 좋지만 자연스러움이 사라져 버렸다.

흰 머리카락이 나기 시작하는 나이의 ‘어른이’는 점점 흐릿해지지만 그나마 어릴 적 봤던 풍경의 추억이라도 남아 있다. ‘어른이’의 손을 잡고 돌아다니는 어린이들에게 이런 동요에서 그려진 모습은 인터넷의 사진이나 방송에서만 보는, 실재하지 않는 풍경처럼 다가올 것이다.

엄청난 풍광을 품은 곳은 아니다. 그저 강이 흐르고, 나무와 풀이 자라고, 새가 날아다니는 어찌 보면 당연한 모습이다.

다만 사람의 손길이 다른 곳보다 덜해 모든 것이 자연스럽다. 아이들에게 시골은 이런 모습이라고 보여줄 수 있는 순수함이 흐르고 있다. 이 순수함에 도시에서 지친 ‘어른이’도 마음의 위로를 받을 듯싶다.
전북 임실을 흐르는 섬진강은 작은 보 근처에 이르면 잔잔해지며 모든 것을 품는다. 어디가 진짜이고 어디가 가짜인지를 분간하기 힘들 정도로 똑같은 풍광을 그려낸다.
◆시인의 ‘특별할 게 없는’ 강

“강은 볼 때마다 다르다. 똑같은 강물을 본 적이 없고, 질리지 않는다. 자연이 하는 말을 받아쓰면 시가 된다.”

70년을 머문 그에게 섬진강은 달라진 것이 거의 없지만 매일이 새롭다. 매일 마주하는 그 풍경이 질릴 만도 한데 한 번도 질려본 적이 없다. 서울에 가거나 외국에 나가도 눈을 감으면 마을 앞 강이 흐르고 산이 서 있는 모습이 떠오른다.

전북 임실 진메마을 앞을 흐르는 강을 따라 매일 새벽 걷는 김용택(70) 시인은 “뭐라 하덜 못하것네. 특별한 것도 없는디”라며 섬진강을 이야기한다.

인근 덕치초등학교에서 교사로 재직하다 한 번씩 다른 지역으로 전근을 갔을 때와 교직에서 물러난 뒤 전주에 잠시 머물렀을 때를 빼곤 고향 진메마을에서 평생을 머문 그다.

‘특별할 것 없다’는 섬진강 얘기를 시작하자 “아침에 새 울음이 어마어마하다”며 시인의 말이 끊이질 않는다. “어떤 새는 ‘어쩔라고 어쩔라고’ 하며 울고, 그러면 다른 새는 ‘괜찮혀 괜찮혀’ 한다. 또 ‘김치찌개 김치찌개’, ‘홀딱벗고 홀딱벗고’ 하며 우는 등 제각기 다르다.”
김용택 시인이 임실 진메마을 집에서 얘기를 나누고 있다.
김용택 시인의 신발.
김용택 시인의 젊은 시절 가족 사진.
김용택 시인의 서재.
매일 새벽에 섬진강변을 걷는 김용택 시인.
시인의 말대로 ‘특별한 게 없는’ 섬진강변을 걸어보는 길은 진메마을에서부터 시작이다.

매일 시인은 천담마을 강변사리센터까지 섬진강을 거닌다. 편도 4㎞ 정도로 다시 진메마을로 돌아오면 1시간30분∼2시간 정도 걸린다. 진메마을은 이름부터 특별할 게 없다.

섬진강 건너편의 산 이름이 장산이다. ‘산이 길다’란 의미의 ‘긴뫼’를 주민들이 진메로 말했던 것이 지금의 마을 이름이 됐다. 자연 그대로의 모습에서 따온 이름으로 15가구 정도가 사는 전형적인 강변마을이다.

신발을 구겨 신고 나선 시인의 집 앞에는 아름드리 느티나무가 한 그루 서 있다. 시인이 어릴 때 옮겨 심은 나무다. 요즘 그의 일과 중 하나가 이 나무 사진을 찍는 거다. 그는 “매일 나무를 찍지만, 볼 때마다 완성돼 있고 볼 때마다 달라져 있어서 질리지 않는다”며 “나무만큼 시를 잘 쓰는 사람이 어디 있느냐”고 말을 던졌다.

강도 한시도 가만히 있지 않는다. 섬진강 상류는 돌이 많다. 돌을 넘어가고, 돌에 깨지며 강물은 시시각각 변한다. 바람이 일면 수면은 알갱이가 부서지는 것처럼 하얀 물보라가 일어 잔물결 친다. 쉴 틈 없이 움직이던 강물은 전망대를 지나 작은 보 근처에 이르면 잔잔해진다. 마치 고인 물처럼 미동조차 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임실 구담마을 언덕에서는 바라 본 굽이치는 섬진강 물줄기.

이곳의 섬진강은 주위 모든 것을 자신의 품에 품는다. 하늘, 나무, 바위, 날아가는 새까지 가리는 것이 없다. 강 위에 떠 있는 모든 것이 강 안에 들어가 있다. 강에 비친 하늘은 더 푸르고, 바위와 나무는 더 진하다. 학창시절 미술시간에 했던 데칼코마니가 바로 이곳에서 펼쳐진다. 어디가 진짜이고 어디가 가짜인지를 분간하기 힘들 정도로 똑같은 풍광을 그려낸다. 한없이 자연이 만든 한 폭의 작품에 빠져들 때쯤 물에서 이는 작은 파장을 보며 최면에서 깨듯 현실로 돌아온다.

진메마을에서 보까지 걷는 거리만큼 더 걸으면 천담마을 강변사리 캠핑장이다. 임실 섬진강 주변 물우리, 일중리, 장암리, 천담리 4개 동네를 묶어 강변사리로 이름 붙였다. 이곳부터 구담마을까지는 2.5㎞ 정도 떨어져 있다. 천담마을은 연못처럼 깊은 소가 많아서, 구담마을은 자라가 많이 살아 붙여진 이름이다. 진메마을부터 강변사리 캠핑장까지는 섬진강 자체 풍광을 즐기는 구간이라면, 캠핑장부터 구담마을까지는 강과 어우러진 마을을 즐길 수 있다.

구담마을은 이맘때 아침이면 물안개가 피어올라 진메마을과는 또 다른 풍경을 연출한다. 매실나무가 곳곳에 심어져 있는데, 수익창출을 위해 하나둘 심게 된 것이 어느새 마을 상징이 됐다. 구담마을 마을회관까지 이어진 길의 끝에 느티나무 한 그루가 서 있다. 언덕 위에 서 있는 나무 너머로 굽이치는 섬진강 물줄기가 이루는 풍경이 일품이다. 한국전쟁 전후, 힘든 시기 살아남기 위한 민초들의 모습을 그린 이광모 감독의 영화 ‘아름다운 시절’을 촬영했다. 어느 곳보다 아름다운 풍광을 품은 곳이 어느 때보다 치열했던 삶의 모습을 담은 공간이 된 것이다.

진메마을부터 구담마을까지 섬진강 마을을 둘러보면 ‘특별할 것 없다’는 시인의 말에 수긍이 가지 않는다. 다만 그가 덧붙인 “흘러가는 구름을 보고 강물을 보면 된다. 자연은 무궁무진하다”며 “자세히 보면 뭔가 눈에 뜨인다. 알아서 보면 된다”는 말이 귓가에 맴돈다.
섬진강 상류는 돌이 많다. 돌을 넘어가고, 돌에 깨지며 수면은 알갱이가 부서지는 것처럼 하얀 물보라가 인다.
섬진강 보에서 주민이 한가로이 낚시를 하고 있다. 진메마을부터 구담마을까지 6㎞ 구간에선 섬진강이 주위와 어우러져 만든 아름다운 그림을 만날 수 있다.

◆신선의 풍경을 간직한 호수

섬진강 발원지는 전북 진안에 있는 데미샘이다. 개울처럼 흘러내리다 임실 옥정호에서 처음으로 큰 물줄기를 이룬다. 우리나라 최초의 다목적댐인 섬진강댐이 조성되면서 골을 메운 물과 산으로 형성된 인공호수가 옥정호다. 목적지는 국사봉(478m) 전망대다. 전망대까지 가는 길은 딱 드라이브 코스다. 굴곡이 심해 속도를 낼 수 없다. 저절로 속도를 늦출 수밖에 없어 천천히 호반 풍경을 감상하며 여유롭게 갈 수 있다.
임실 옥정호 붕어섬.

전망대 주차장에 도착한 뒤 가파른 나무계단과 등산로를 따라 오르면 전망대에 이른다. 옥정호를 가장 아름답게 감상할 수 있는 이곳에서는 호수 속에 떠 있는 붕어섬이 한눈에 들어온다. 이 섬의 원래 이름은 ‘외안날’이지만 붕어모양과 흡사하다고 해서 붕어섬으로 이름이 거의 굳어졌다. 옥정호는 낮시간 말고, 새벽에 찾는 이들도 많다. 땅과 물의 온도 차로 인해 동틀 때쯤 보이는 운해로 장관을 이루기 때문이다. 봄과 가을이 아무래도 기온차가 심해 다른 계절보다 안개 낄 때가 많다. 신선이 사는 곳의 풍경인 선경(仙境)이 어떤 모습인지 보려면 부지런을 떨어야 한다.

임실=글·사진 이귀전 기자 frei5922@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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