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검색

무력하거나 암울하거나 … 분노의 청춘

입력 : 2018-05-17 20:11:15 수정 : 2018-05-17 20:11:15

인쇄 메일 글씨 크기 선택 가장 작은 크기 글자 한 단계 작은 크기 글자 기본 크기 글자 한 단계 큰 크기 글자 가장 큰 크기 글자

이창동 신작 ‘버닝’ 칸 상영 후 국내 개봉 ‘이창동 감독의 세 번째 칸국제영화제 경쟁부문 진출작, 무라카미 하루키 소설이 원작, 유아인과 스티븐 연의 만남, 수개월의 오디션을 통해 뽑힌 신인 전종서의 ‘파격 노출’ 데뷔….’

제작 단계에서 개봉까지 숱한 화제를 뿌리며 기대를 모았던 이창동 감독의 8년 만의 신작 ‘버닝’이 베일을 벗었다.

‘버닝’은 16일(현지시간) 프랑스 칸 뤼미에르 극장에서 상영한 뒤 17일 곧바로 국내 개봉했다. 해외 평론가 반응부터 살피자면, 칸영화제 선정 공식 매체인 ‘아이온 시네마’에 공개된 평점 순위에서 16일까지 상영된 경쟁작 16편(총 21편) 중 최고점인 3.9점(4점 만점)을 기록 중이다. ‘황금종려상’ 수상 기대가 더욱 높아졌다.
‘버닝’은 주인공 종수(유아인)가 의문의 남자가 나타난 뒤 사라진 친구 해미를 찾아 나선다는 미스터리의 외피에 분노를 태울 데 없는 암울한 청춘들의 현실로 속을 채웠다.
CGV아트하우스 제공
‘버닝’의 주인공은 두 남자와 한 여자다. 이창동 감독의 작품이라는 데서 풋풋한 삼각관계는 아니라는 것을 예상할 수 있다.

유통업체에서 비정규직으로 일하며 틈틈이 소설을 쓰는 20대 청년 종수(유아인)는 어느 날 우연히 어린 시절 동네 친구 해미(전종서)를 만난다. 아프리카로 여행을 떠났던 해미는 돌아온 뒤 케냐 공항에서 만난 한국 남자 벤(스티븐 연)을 종수에게 소개시킨다. 고급 빌라에 살며 스포츠카를 몰고 다니는 벤은 늘 예의바르지만 속을 알 수 없다.

종수의 집에서 셋이 만난 어느 날, 벤은 종수에게 자신이 “비닐하우스를 태우는 취미가 있다”며 곧 종수의 집 근처 비닐하우스를 태울 것이라고 말한다. 종수는 날마다 인근 비닐하우스를 점검하지만 아무것도 타지 않는다. 그날 이후 해미가 연락이 닿지 않자 종수는 섬뜩한 예감에 사로잡힌다.

벤(스티븐 연).
영화는 의문의 남자가 나타난 뒤 사라진 여자를 찾아가는 미스터리다. 중반부까지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 ‘헛간을 태우다’와 거의 같다. 소설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채 끝나 모든 것을 독자의 상상에 맡기는 반면, 영화 ‘버닝’은 관객들의 추측을 돕는 여러 단서와 장치들을 제공하며 무슨 일인가 일어난 뒤 끝이 난다는 것이 차이점이다.

하지만 ‘버닝’은 단순히 미스터리 장르에 머물지 않는다. 이창동 감독의 전작들처럼 세상의 어두운 부분을 지독히 현실적으로 담아낸다. ‘버닝’의 초점은 ‘암울한 청춘’에 맞춰져 있다. 이를 위해 감독은 ‘헛간을 태우다’에서 단순한 화자에 불과했던 30대 남성에, 윌리엄 포크너의 소설 ‘헛간 타오르다’의 어린 주인공을 입힌 새로운 인물 종수를 창조했다. 유아인이 연기한 종수는 늘 후줄근한 무채색 옷을 입고 초점 흐릿한 눈빛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소설가의 꿈은 막연하고 미래는 보이지 않는다. 해미를 만나 피어났던 작은 희망은, 해미의 후암동 북향집에 잠깐 비치는 남산타워에 반사된 햇빛처럼 금세 사라진다. 뒤에 남는 건 허무함과 더 깊어진 절망뿐이다. 가끔 아르바이트를 하며 어쩌다 알게 된 남자들을 통해 생활을 유지하는 해미의 삶 역시 욕망은 있고 희망은 없다. 여기에 ‘위대한 개츠비’처럼 하는 일 없이도 최상의 것을 누리고 사는 벤의 등장은 종수, 해미와 명확히 대비돼 관객들마저 무력감에 빠지게 한다.
해미(전종서).
이창동 감독은 ‘버닝’ 시나리오를 함께 작업한 오정미 작가와의 대화에서 “한국 청년들은 희망 없는 현재에 분노를 느끼는데 그 분노의 대상을 찾을 수 없어 더욱 무력감을 느끼는 것 같다”며 “그런데 겉으로는 아무 일 없다는 듯 멀쩡해 보이는 이 세상이 그들에게는 커다란 수수께끼일 것”이라고 영화의 메시지를 전했다.

평론가들은 ‘버닝’에서 기존 이창동 감독의 문학적 스타일을 한층 더 영화적으로 풀어낸 시도가 돋보인다고 평한다.

양경미 평론가는 “촬영과 음악이 영화의 미스터리한 분위기와 잘 맞고, 기존의 이창동 감독 영화들과 달리 감각적이고 영화적”이라며 “수많은 이미지의 은유를 통해 관객 스스로 상상하고, 결과를 유추하게 만든 시도가 새롭지만 한편으론 예술영화를 만들기 위해 만든 영화 같다는 인상이 들어 아쉽기도 하다”고 말했다.

비닐하우스, 리틀 헝거와 그레이트 헝거, 진실과 거짓, 고양이, 세상의 도덕…. 영화에 등장하는 이미지와 대사들를 되짚고 곱씹으면서 관객이 각자 해석해가는 재미가 가장 크다. 하지만 러닝타임 147분 내내 희망은 털끝만큼도 찾아볼 수 없어 무겁게 느껴질 수 있다. 청소년관람불가.

김희원 기자 azahoit@segye.com

[ⓒ 세계일보 & Segye.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피니언

포토

한지민 '우아하게'
  • 한지민 '우아하게'
  • 아일릿 원희 '시크한 볼하트'
  • 뉴진스 민지 '반가운 손인사'
  • 최지우 '여신 미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