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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호원칼럼] 이제 평화가 올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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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8-04-30 23:34:44 수정 : 2018-04-30 23:34: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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뭉클한 감성 연출한 남북정상회담/ 화려한 미사(美辭)… 현실은 달라/‘돈으로 평화’ 세폐정책 어른거려/ 세폐로 번영을 이룬 역사는 없다 파격이었다. 6·25전쟁 후 처음 남한 땅을 밟은 북한의 일인자. 판문점 군사분계선(MDL)을 넘은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문재인 대통령의 손을 잡고 5㎝ 높이의 분계선 턱을 넘어 북한 땅을 함께 밟았다. 역사적인 장면이다.

“저렇게 쉽게 넘는 턱을 왜 그리도 넘기 힘들었을까.” 누구나 이런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강호원 논설위원
파격은 이어졌다. 1998년 정주영 회장이 소 1001마리를 몰고 간 ‘소떼길’ 가에 소나무를 심은 뒤 ‘도보다리’를 걸었다. 다리 끝 벤치에 앉아 30분 동안 나눈 밀담. 역시 역사적인 장면이다.

“무슨 이야기를 나누는 걸까.” 생중계된 모습을 지켜본 사람들은 이런 생각도 하지 않았을까. “마주 앉으면 무슨 말이든 주고받을 수 있는데, 왜 그리도 대화하기 힘들었을까.”

우리만 눈을 동그랗게 떴을까. 남북한을 장기짝쯤으로 여기는 주변 열강 정상들의 눈도 둥그레졌을 게 틀림없다. 뒷모습만 보이는 문 대통령, 말을 듣고 답하는 김정은. 도청조차 힘든 야외 밀담에 “대체 무슨 말을 나누는 것이냐”며 안달했을 성싶다. 그 장면을 보며 ‘머쓱했을 사람’은 시진핑 국가주석이다. 중국인과 만나면 통역을 세우고, 남북이 만나면 통역이 필요 없는 모습을 보고도 “한반도는 중국의 역사”라고 다시 강변할까. ‘실망스러웠을 사람’은 아베 신조 총리다. 북핵을 발판으로 일본을 ‘전쟁할 수 있는 나라’로 이끌던 극우노선은 상처받았다.

‘혼란스러웠을 사람’은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다. 미 본토 핵공격 위협에 군사옵션을 만지작거린 트럼프 대통령. “한국은 미국 쪽에 설까, 북한 쪽에 설까”를 저울질하지 않았을까. “주한미군 철수는 북한과도 논의할 이슈 중 일부”라는 제임스 매티스 미 국방장관의 말에는 복잡한 심경이 담겨 있다.

‘감성’을 연출한 남북정상회담. 말은 더 감성적이다. 김정은, “마주 서고 보니 서로 갈라져 살 수 없는 한 혈육이며 어느 이웃에도 비길 수 없는 동족이라는 것을 가슴 뭉클하게 절감했다. … 싸워야 할 이민족이 아니라 단합하여 화목하게 살아야 할 한 핏줄을 이은 한 민족이다.” 문 대통령, “우리가 사는 땅, 하늘, 바다 어디에서도 일체의 적대행위를 하지 않을 것이다.”

뭉클한 미사(美辭)다. 그 모습을 보고, 그 말을 들으면 ‘통일 도장’을 당장이라도 찍을 것 같다. 이제 평화가 도래한걸까.

물어 보자. ‘뭉클한 동족애’를 느끼는 북한 정권은 왜 그토록 참혹한 전쟁을 일으켰는가. 6·25전쟁, 350만명이 넘는 사상자를 냈다. 천안함 폭침, 연평도 포격, 불바다 위협…. 2012년 이후에만 60발이 넘는 탄도미사일을 쐈다. 뭉클한 동족애를 미처 느끼지 못해 벌인 일인가. 1993년 핵확산금지조약(NPT) 탈퇴 후 핵개발 25년. 북한은 핵을 포기할까.

‘감성’을 부르는 정치 미사와 장면들. 현실은 분명 다르다. 곧이곧대로 믿는다면 아둔하다는 핀잔을 면하기 힘들다. 정치 미사는 대중을 조종하는 화법일 뿐이다.

꺼풀을 벗겨 보면 ‘돈으로 평화를 사는’ 세폐(歲幣)정책이 어른거린다. 판문점 선언문, “남북은 민족경제의 균형적 발전과 공동번영을 이룩하기 위하여 10·4선언에서 합의된 사업들을 적극 추진해 나가며 동해선·경의선 철도와 도로들을 연결하고 현대화하는 실천적 대책을 취해 나간다.” 균형적 발전? 무엇으로 균형을 이루겠다는 것인가. 실패한 북한 공산주의 체제를 돈으로 떠받쳐 균형을 이루겠다는 말인가.

세폐정책의 결말은 늘 참혹하다. 송(宋)의 역사. 강성한 거란족의 나라 요(遼)에게 해마다 은 10만냥, 비단 20만필을 바치며 평화를 유지했다. 거란이 쇠퇴하고 여진족의 나라 금(金)이 등장하자 이번에는 신하를 칭하며 은 25만냥과 비단 25만필을 세공으로 바쳤다. 결말은? 나라 곳간은 텅 비었다. 금의 공격에 결국 양자강 남쪽으로 쫓겨났다. 송은 얼마 뒤 몽고제국에 패망하고 만다. 영웅 악비(岳飛)도 ‘세폐를 바치다 망한 나라’를 지킬 수는 없었다.

세폐정책이 해피엔딩으로 끝난 역사는 없다. 상대는 강해지고 자신은 약해지니 재앙이 따른다. 우리라고 무엇이 다를까. ‘연출된 감성’이 걱정스러운 이유다.

강호원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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