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순실만인가. 드루킹이 정치 권력에 접근해 호감을 산 방식도 라스푸틴 못지않다. 그는 취미가 자미두수(紫微斗?·중국의 도교에서 시작된 점술)라고 밝혔다. 사주명리와 함께 사람의 일생까지 예측하는 것으로 전해졌다. 그는 2017년 1월 ‘송하비결’을 재해석했다며 당시 문재인 후보를 왕조의 시조에 비유해 띄웠다.
“계림침백(鷄林侵百)
영남세력이 호남을 침범하여
황산분투(黃山奮鬪)
황산벌에서 떨쳐 싸우지만
계백패읍(鷄伯悖泣)
호남이 어그러져 눈물을 흘린다
가야회수(伽倻回首)
부·울·경이 그 지지를 바꾸어 돌려서
해룡기두(海龍起豆)
바다용이 새로운 시대를 열게 된다.”
신라군의 침범에 맞섰던 계백이 황산벌에서 패한 뒤 백제가 멸망하고, 백제와 긴밀한 외교관계를 유지했던 가야마저 등을 돌린 뒤 수중릉으로 유명한 신라 문무왕이 삼국통일을 이룬 역사를 설명하고 있다. 그런데 드루킹은 엉뚱한 의미를 갖다 붙였다. “박근혜가 탄핵된 뒤 대선이 치러지는데 양자 대결이 펼쳐진다. 영남을 배경으로 한 인물은 문재인이다. ‘침백’은 문재인이 호남의 지지를 얻기 위해서 애쓰는 것이다. 이 싸움을 황산벌의 전투로 표현하고 있다. ‘계백패읍’이라는 표현은 안철수와 동교동 등 국민의당 세력이 패배하여 눈물을 흘린다는 것이다. ‘가야’가 머리를 돌린다는 표현은 새누리당을 지지했던 부산 울산 경남이 문재인 지지로 돌아선다는 것을 의미한다. ‘해룡’이란 바다에서 태어난 자이다. 문재인을 가리키는 말이다. 두(豆)는 제사에 쓰는 그릇이다. 그로부터 제사, 즉 왕조가 시작된다는 의미이다.”
100여년 전에 역사를 설명한 글을 오늘날 정치권력의 눈에 들도록 분칠한 것이다. 실세 중의 실세라는 김경수 의원에다가 후보 부인까지 찾아간 것을 보면 감언이설에 넘어간 게 아닌지 의혹이 생기지 않을 수 없다. 버선발로 뛰어간 듯한 인상마저 주는 것을 보면 최순실의 발호에서 아무 교훈도 얻지 못한 듯하다.
드루킹은 송하비결을 인용하면서 박근혜를 독재자에 비유해 피를 토하고 쓰러질 것이라고 했다. 그의 주장이 황당한 것은 2009년 ‘박사모’ 정광용 회장을 통해 박 전 대통령의 사주풀이를 전달하려고 했던 전력 때문이다. 메신저 역할을 했던 박사모 회원은 사주풀이인지 찬양문인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좋은 이야기만 가득했다고 했다. 권력에 줄을 대기 위해 용비어천가를 부른 것이다. 그러다가 실패하자 독재자로 둔갑시켰다.
한용걸 논설위원 |
라스푸틴과 진령군은 무당 노릇으로 제정러시아 황실과 조선말기 왕실을 좌지우지했다. 드루킹은 종말론과 명리학을 기반으로 추종자들을 끌어모으고 권력에 접근했다. 드루킹은 “120년 전 좌절된 꿈(동학혁명)을 실현하자”면서 추종자들을 선동했다. 이들이 6자 대명왕진언 ‘옴마니 반메훔’을 외웠다고 전해지는 것으로 보면 종교적 성향마저 보이기도 한다. 문 캠프가 이런 인사의 감언이설과 선동에 휘둘렸으니 판단력이 흐려져도 이만저만 흐려진 게 아니다. 전 정권과 같은 운명이 되지 않으려면 유사세력을 도려내고 분명하게 단절해야 한다.
한용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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