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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타워] 핫라인과 악마의 디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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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8-04-23 00:23:12 수정 : 2018-04-23 00:2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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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 정상 직접소통 가능해져
첫 시험통화도 혼선 없이 성공
비핵화 합의·검증 등 고비마다
진심 확인할 최선의 장치 마련
“빠른 갈색여우는 게으른 개를 뛰어 넘는다. 1234567890.”

미·소 냉전 역사에서 유명한 문장이다. 인류 역사상 핵전쟁 위기에 가장 근접했던 쿠바 미사일 위기의 교훈으로 1963년 8월 30일 개통된 미·소 핫라인의 첫 시험 메시지다.

박성준 정치부 차장
핵폭격기·핵공격잠수함이 대치하는 인류가 절멸할 위기였던 당시 상황은 “쿠바에 미사일을 설치하지 않겠다”는 니키타 흐루쇼프 소련 서기장의 라디오 연설로 일단락됐다. 하지만 이조차 공식 경로가 아닌 라디오방송을 통해 이뤄져 ‘언론 플레이용 기만책 아니냐’는 의심을 받아야 했다. 훗날 긴박한 상황에서 암호화-전보-해독·번역 등의 과정을 거쳐 메시지를 전달하는 데 미·소 정상 간에 12시간 이상이 걸려 택한 고육책이었음이 드러나면서 미·소 핫라인이 가설된 것이다.

미·소 핫라인의 역할은 냉전 내내 제한적이었다. 국제분쟁 발생 시 양측 주요 군대 이동 상황에 대한 오해를 방지하는 차원에서 서로 미리 통지할 때에나 사용됐다. 핫라인 개설 몇 달 후 미국에서 보낸 첫 메시지는 존 F 케네디 미국 대통령 암살 관련 통지였다. 소련에선 1967년 이집트과 이스라엘 간에 벌어진 6일전쟁 때 첫 메시지를 보냈다.

역사상 가장 유명한 핫라인이었지만 “우리 군사를 이동시키니 그런 줄 알아라”라고 통지하는 데 쓰였을 뿐 상호 소통에 큰 역할은 못한 셈이다. 알파벳 26자가 모두 한 번씩 들어가 미측이 택했던 “The quick brown fox jumps over the lazy dog”라는 첫 시험 메시지부터가 혼선을 일으켰다. 이를 받은 소련 측이 “여우가 개 등을 왜 뛰어넘느냐. 이게 뭔 소리냐”며 의아해했다는 것이다. 이후 정기적으로 이뤄진 테스트 메시지 교환에는 세익스피어, 마크 트웨인, 안톤 체호프 작품이나 백과사전 및 응급구조법 등의 일부가 인용됐다. 곰이 국가 상징인 러시아가 오해할 수 있는 동화 ‘곰돌이 푸’는 인용이 금지됐다.

분단 70년 역사상 최초로 지난 20일 청와대와 북한 권력정점인 국무위원회를 이은 남북 핫라인 첫 시험 통화는 혼선 없이 깔끔하게 이뤄졌다. 북한 국무위 담당자와 송인배 청와대 제1부속실장 간에 이뤄진 통화를 옆에서 이어폰을 끼고 함께 들은 윤건영 청와대 국정상황실장은 “마치 옆집에서 전화하는 듯한 느낌”이라고 설명했다. “평양입니다(북)”, “안녕하십니까. 여기는 청와대입니다(남)”로 시작해 “열심히 노력해서 좋은 성과있기를 바라겠습니다(남)”,“그러면 이것으로 시험통화를 끝냅시다(북)”로 이어진 통화에선 서로 다른 언어·문화에서 생겨난 오해는 찾아볼 수 없다.

조만간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역사적 첫 통화를 할 남북 핫라인은 정상 간 직접소통이란 점에서 미·소 핫라인에 비할 바 아니다. 상호 동의만 있다면 국제·위성전화 등을 통해 전 세계 누구나 전화를 걸고 받을 수 있는 세상이긴 하다. 일부에선 “기존에도 남북 핫라인이 존재했다. 또 안 받으면 그만이다”라고 평가절하한다.

하지만 이번 남북 정상 간 핫라인 개설은 365일 24시간 두 정상끼리 언제든지 직접 소통하겠다는 의지를 나타내고 이를 실천한 것이어서 의미가 크다. 위에서 재채기만 해도 아래에선 몸살을 앓는 식의 오해와 착오로 앞으로 있을 남북대화 과정에서 벌어질 혼선을 줄이는 데도 실질적 기여를 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열강의 엇갈린 이해와 정보망이 촘촘하게 얽혀있는 한반도 정국에서 남북 정상이 특사 교환 등을 거칠 필요 없이 속내를 서로 파악할 수 있다는 점도 의미심장하다. 이 때문에 시험통화를 비롯해 남북 핫라인 운용 담당을 문 대통령을 24시간 보좌하는 송 부속실장이 맡은 것이며, 신원이 알려지지 않은 북측 담당 역시 비슷한 위상을 지닌 인물인 것으로 추정된다.

물론 스포츠에서 최고의 장비가 우승을 보장하지 않듯, 정상 간 핫라인이 앞으로 있을 비핵화 등 남북대화의 난제를 풀 수 있는 열쇠 자체는 아니다. 비핵화 합의 및 이행, 검증 등 각 고비마다 도사리고 있을 ‘악마의 디테일’이 튀어나올 때 양측의 진심과 의지를 확인할 수 있는 최선의 장치가 마련됐다는 게 올바른 평가일 것이다.

박성준 정치부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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