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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착취재] 쇠 깎듯 한 자 한 자 눌러쓴 詩… "노동은 행복이다"

입력 : 2018-04-22 07:00:00 수정 : 2018-04-20 15:3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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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계부품 장인 김정한씨의 ‘브라보! 인생’
창고 셔터에 이곳의 이름을 알려주는 제일기어가 4행시로 적혀 있다.
간판도 없고 한 줄기 빛도 들어오지 않는 서울 양평동의 한 창고. 어두침침한 그곳에서 김정한(75) 사장과 그의 45년 지기이자 동료 성영평(76)씨 그리고 그들만큼이나 나이를 먹은 기계들이 자리를 잡고 있다. 창고의 유일한 보안장치인 셔터에는 이곳의 이름인 ‘제일기어’가 4행시로 적혀 눈길을 끈다.
김 사장(오른쪽)과 45년 된 친구이자 동료 성영평씨가 선반기계를 보며 대화하고 있다.
김 사장이 선반기계로 쇠를 깎고 있다.
45년 된 친구이자 동료인 성씨가 선반기계에서 쇠를 깎고 있다.

8남매 중 장남인 김 사장은 어려서부터 공부가 좋았고 글쓰기도 즐겼지만 집안 형편이 어려웠다. 돈을 벌기 위해 1962년 고향 근처 대도시인 부산 범일동으로 나와 각종 기계부품 만드는 공작 일을 배웠다. 서울로 상경해 청파동, 문래동을 거쳐 지금의 양평동까지 56년간 기어장치(2개 또는 그 이상의 축 사이에 회전이나 동력을 전달하는 장치)와 각종 기계 부품을 만들고 있지만 지금 기자와 마주한 자리에서는 자신을 시인이라 소개한다.

김 사장은 매일 오전 8시에 출근해 제일 먼저 선반기계의 백열등을 켠다. 그리고 그 불빛에 의지해 크고 무거운 쇠 파이프를 힘겹게 들어 올린다. 도면을 보고 버니어 캘리퍼스(길이를 측정하는 공구)를 이용해 치수를 측정하며 재단을 한다. 얼마 지나지 않아 파이프는 기계 위에서 일정한 속도로 돈다. 몇 번의 앞뒤 왕복 운동과 계속되는 치수 측정을 끝낸 녹슨 파이프는 은빛의 톱니로 모습을 바꾼다. 방앗간 기계에 들어가는 부품이 완성되는 단계다.
김 사장이 재료를 사오는 서울 문래동에서 한 직원이 쇠 파이프를 절단하고 있다.
작업장 한켠에 쌓여 있는 쇠 파이프들이 마치 한폭의 추상화처럼 보인다.
호빙머신에서 기어장치의 부품인 톱니가 완성되고 있다.
완성된 톱니가 작업장 한쪽에 쌓여 있다.
호빙머신(기어 절삭용 공작기계) 벽에 96년도에 적은 수치표가 붙어 있다.
작업장 한편에 쇳가루가 쌓여 있다.
“어릴 적부터 몸이 약했는데 매일 반복되는 일을 하다 보니 천식과 만성 위장병으로 고생했어. 그래서 쉬는 날이면 책을 들고 북한산을 비롯한 근처 산들을 찾았지. 글을 읽고 일기식으로 글을 쓰다 보니까 2000년에는 시로 등단까지 하게 되더라고.” 시인으로 등단하던 당시를 회상하는 김 사장의 얼굴에 미소가 번진다. “어린 시절에 공부에 한이 맺혀 일도 공부도 열심히 했지. 한때는 온갖 신문을 한꺼번에 구독했어. 열심히 읽었지. 그게 공부가 되더라고.” 선반기계 불빛 아래서 적은 글이 벌써 4권의 책이 됐다고 한다.
김 사장이 작업 중에 생각나는 글을 메모하고 있다.
김 사장이 작업 중에 생각나는 글을 기름이 묻은 장갑을 착용한 채 메모하고 있다.
서울 양평동 제일기어에서 김정한 사장이 출간한 시집을 들고 환하게 웃고 있다.
김 사장은 경기가 좋았던 80년대를 추억하며 말을 이어갔다. “그때는 매일 12시간 이상 일을 했던 거 같아. 지금은 저 친구와 둘이서 일하지만 그때는 직원도 꽤 많았지. 현대 정주영 회장 알지? 그분 사진을 일터에 걸어두고 다들 자수성가하겠다고 참 열심히 일했지.” 경제 사정이 나빠지고 하나둘 직원들이 떠나도 공장을 버릴 수는 없었다고 했다. “그래도 난 지금이 더 행복해. 내 나이에 어디 가서 일해? 아직도 날 찾는 오랜 거래처 사람들이 꽤 있어.” 김 사장은 납품 기한을 맞추기 위해 12시간 이상 일할 때 살아있음을 느낀다고 말한다. 기름 묻은 장갑을 낀 손으로 시와 일기를 써 내려갈 때가 가장 행복한 시간이라며 껄껄 웃는 김 사장의 얼굴에서 멋진 시인의 모습이 느껴진다.

사진·글=이재문 기자 moon@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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