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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인을 기리며] DJ와 민주화 운동… ‘3金 시대’때 활약

입력 : 2018-04-18 23:10:11 수정 : 2018-04-18 23:1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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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선 지낸 후농 김상현 前의원 / 31세 정계 입문… ‘마당발’ 인맥 / YS의 상도동계와도 친분 유지
김상현 전 국회의원(왼쪽)이 새정치국민회의 총재 시절 김대중 전 대통령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모습.
세계일보 자료사진
더불어민주당 상임고문인 후농(後農) 김상현 전 국회의원이 노환으로 18일 별세했다. 향년 83세.

민주당 김영호 의원의 부친인 고인은 김대중(DJ) 김영삼(YS) 전 대통령이 활동하던 ‘3김(김종필 포함) 정치’ 시대에 양김의 계파에서 활발하게 활동했다. 그의 호(號)인 후농은 김대중 전 대통령을 존경하고 닮고 싶은 마음에서 김 전 대통령의 아호인 '후광'에서 따온 것으로 알려졌다.

1935년 전남 장성에서 출생해 10대 때 부모를 모두 여읜 뒤 갖은 어려움을 겪다가 DJ와 인연으로 정계에 입문했다. 1965년 서울 서대문갑 보궐선거에서 원내에 처음 진입했고 내리 3선에 성공했다.

YS가 ‘40대 기수론’을 들고 신민당 대선후보 경선에 참여했을 때 경쟁자였던 DJ를 도와 후보로 만드는 데 일조했다. 박정희 정권 때 ‘유신 반대운동’과 ‘김대중 내란음모사건’으로 연거푸 옥고를 치르고 피선거권이 박탈되면서 야인 생활을 하기도 했다.

전두환 신군부의 5공화국 시절이던 1984년 양김이 민주화추진협의회(민추협)를 결성하자 당시 미국에 체류하고 있던 DJ를 대신해 공동의장 권한대행을 맡았고 1985년 2월 선거에서 신민당 돌풍을 일으키는 데 기여했다.

1987년 동교동계와 상교동계가 주축이 된 통일민주당에 참여했으며 대선후보 선출문제로 DJ가 탈당해 평화민주당을 창당했을 때에는 ‘분열의 편에 서지 않겠다’며 통일민주당에 남아 YS의 대선 운동을 지원했다. DJ에게 맞서다 결국 1988년 총선에서 낙선했다.

1990년 통일민주당이 당시 여당이었던 민주정의당과 이른바 ‘3당 합당’으로 민주자유당을 창당했을 때에는 노무현 전 대통령 등 소신파 정치인과 함께 합류하지 않았다. 이후 민주당 계통의 정당에 주로 몸담았다.

고인은 1992년 대선에 패한 뒤 정계를 은퇴했던 김대중 전 대통령이 복귀해 만든 새정치국민회의에 합류했으며 14대 국회의원 선거에 당선되면서 다시 원내에 진입하는 데 성공했다. 1993년 민주당에서 이기택 전 총재와 당권을 놓고 대결한 고인은 1997년 대선 때는 당내 경선에서 김대중 당시 후보에 맞서 두사람의 관계가 소원해지기도 했다.

2000년 16대 총선에서 민주당 공천을 받지 못하자 “물구나무를 서서라도 국회에 들어가겠다”고 장담한 일화는 유명하다. 결국 2002년 국회의원 보궐선거에서 당선돼 국회에 다시 입성했다. 16대 대선과정에서는 노무현 전 대통령을 지지, 참여정부 출범에 기여했다. 6대부터 16대 국회까지 모두 6선을 지낸 고인은 생전에 재치 있는 연설과 지략, ‘마당발’ 인맥으로 특히 잘 알려졌다.

유족으로는 부인 정희원씨, 아들 윤호(우림FMG 대표이사)·준호(우림FMG 전무)·영호(국회의원)씨와 딸 현주씨가 있다. 빈소는 서울 신촌 세브란스병원 장례식장 12호에 마련됐으며 발인은 22일, 장지는 경기도 파주시 나자렛묘원이다.

최형창 기자 calling@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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