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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독한 시련을 견딘 폐침목·대들보… 그 스스로 많은 이야기를 품고 있죠”

입력 : 2018-04-17 20:44:07 수정 : 2018-04-17 20:44: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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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전 여는 조각가 정현 조각가에게 중요한 것은 어떤 물질(재료)을 사용하느냐다. 재료의 이미지가 스스로 얘기를 하기 때문이다. 재료가 무엇이냐에 따라 전혀 다른 작품이 되고, 이야기가 달라진다. 조각가 정현(62)에게도 재료가 중요하다.

“저는 혹독한 시련을 잘 견뎌낸 재료들을 작품 소재로 삼고 있습니다. 그 스스로가 많은 이야기를 해주기 때문이지요.”

그는 쇄석 위에 놓여 오랫동안 열차의 무게를 감당해 온 침목(枕木)이나 집을 버텨 온 폐한옥의 목재를 사용한다.

“인천에서 자라 어린 시절 기찻길이 놀이터였지요. 화물기차가 지나갈 때면 땅이 푹 꺼지는 듯했고. 그 육중함에 공포감이 몰려오기도 했어요. 침목은 그런 것들을 그냥 감내해 낸 존재이죠.”

그는 폐침목에서 장중한 그 무엇을 봤다. 무게의 자국들에서 숭고함이 감지됐다. 평범한 것 어디에도 숭고는 없다는 점을 역설적으로 체험한 것이다. 폐침목은 인간 군상이 됐다. 삶의 지난함을 건너온 처연함이자 장엄함이다. 이 지점에서 그는 영혼이 고양(高揚)되는 숭고미를 발견하게 된다. 히말라야산맥이나 사하라사막 같은 거대하고 광대한 풍경에서 느껴지는 숭고미다.

오랜 세월 서원을 지탱해 온 대들보로 만든 작품. 빛바랜 단청에선 구름이며 꽃이며 항아리를 그린 흔적이 희미하게 남아 있다.
정 작가는 사라져 가는 것에서 낚아챈 솟아오르는 에너지를 6m 크기의 콜타르 드로잉으로 형상화하기도 했다. 침목을 방수, 방충 처리할 때 쓰는 콜타르를 물감으로 삼은 것이다. 마치 고목에서 새싹이 기운차게 돋는 모양새다.

“프랑스 원로시인 미셸 드기의 글이 떠오릅니다. ‘찰나적으로 획득한 불멸성의 지점, 다시 말해 죽음에 대항하여 죽음으로부터 낚아챈 말은 숭고하다. 그 안에서 생성·소멸의 모든 것은 하나가 된다. 그 지점은 죽음의 곡선에 속하되 그와 동시에 그 곡선을 거슬러오르고, 곡선과 접촉하는 순간 역력한 방향의 전환을 일으키며 위로 솟아오르는 정점이자 육체와 영혼이 합쳐진 채로 정지하는 절정이다. 또한 불안정한 산꼭대기에서 최대한 높이 뛰어내리는 순간에 그런 것처럼, 극미한 무중력의 유토피아다.’ 전적으로 공감이 되는 글입니다.”

경남 지역의 서원에서 나온 낡고 거대한 대들보를 재료로 한 그의 신작도 같은 맥락을 가지고 있다. 300년 된 부산 기장군 향교 대들보가 전시장에 그대로 놓였다.

“지난해 4월 경남 함양군 지리산 끝자락 제재소에서 구한 폐목입니다. 흰개미가 쓸어 폐기된 대들보 위에 먹물을 입힌 나무 3개를 꽂았습니다.”

솟구치는 에너지가 느껴지는 대형 콜타르 드로잉 작품 앞에 선 정현 작가. 그는 견딤의 미학을 통해 숭고한 기운을 보여주고 싶었다고 말한다.
그는 오랜 세월 허공을 떠받쳤던 모습에서, 이젠 사라질 수밖에 없는 순간에서 또 다른 에너지를 보았다. 소멸이 생성으로 이어지는 솟아오름이다. 우리 가슴을 흔드는 미적 고양이라 할 수 있다.

“생명의 본질을 성찰케 하는 순간이지요. 그것이 다름 아닌 숭고미입니다.”

그는 작업실이 있던 고양시 덕은동 한옥들이 재개발로 철거될 때 목재 잔해물을 수거해 작품 소재로 활용했다. 먹물로 채색해 둥근 구조물과 파도의 형상을 만들었다.

“삶이 응축된 잔해물들입니다. 날카로운 에너지의 돌출을 거기서 볼 수 있었습니다.”

그는 폐목에서 삶의 숭고함을 증언하는 소리들을 들었던 것이다. 어쩌면 소멸하여 가는 것들의 아름다움일 수도 있다.

2016년 프랑스 파리 왕궁정원에서 선보였던 인간군상 ‘침목’ 작품은 르몽드에 소개되며 화제를 모았다. 당시 파리테러가 있었던 때라 견딤의 미학, 무언의 항거로 받아들여졌다. 5월22일까지 금호미술관에서 그의 초대전이 열린다. 찰나적으로 느껴지는 숭고미의 솟구침을 엿볼 수 있는 전시다.

편완식 객원미술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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