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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현칼럼] ‘춘풍추상’ 액자가 부끄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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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8-04-17 00:09:16 수정 : 2018-04-17 00:12: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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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로남불’ 김기식 사태 놓고 / 법·평균 따진 답답한 청와대 / 선관위 위법 판단 원망 말고 / 동서양의 황금률 되새기기를

구약성경은 토라와 예언서, 성문서로 이뤄진다. 가장 중요한 것은 모세오경을 가리키는 토라다. 토라는 좁게는 율법서를, 넓게는 구약성경 전체를 가리키기도 한다. 적어도 유대인들에겐 최상위 규범인 것이다. 이 토라를 요약해 달라고 옛 유대 랍비 힐렐에게 한 회의론자가 청했다. 힐렐은 짧게 답했다. “당신이 싫어하는 것은 이웃에게도 행하지 마시오. 그것이 토라 전체의 이야기며 나머지는 그것에 대한 설명이오.”

동양에도 같은 규범을 제시한 이가 있다. 공자다. 제자 자공이 평생 실천할 한마디 가르침을 청하자 간결히 답했다. 서(恕)일 것이라고. 서는 무엇인가. ‘논어’ 위령공 편에 따르면 “기소불욕 물시어인(己所不欲勿施於人)”이다. 자기가 원하지 않는 것은 남에게 시켜서도 안 되는 것이다. 힐렐의 답과 판박이다. 세상 사는 이치는 시공을 떠나 똑같기 때문일 것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2월 청와대 비서관실에 액자를 돌렸다. ‘춘풍추상(春風秋霜)’이란 글이 담긴 액자였다. 액자를 돌린 이유에 대해 ‘채근담’에 나오는 말로 “남을 대할 때는 봄바람처럼 부드럽게 대하고, 자신을 대할 때는 가을 서리처럼 엄격하게 대한다”는 뜻이 담겨 있다고 직접 설명했다. 매우 명료한 방향 제시였다. 적어도 공직사회는 그렇게 가야 하는 것이다. 춘풍추상은 힐렐의 가르침, 공자의 가르침과 통하는 경책(警策)이다.

국민은 이래서 더 헷갈린다. 김기식 금융감독원장이 어제 사의를 표명했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가 ‘셀프 후원’ 의혹에 대해 위법 결론을 내리자 퇴진을 선언한 것이다. 이로써 꼴사납던 김기식 사태가 일단락됐다. 사필귀정이다. 하지만 여기서 청와대의 처신을 짚지 않을 수 없다. 왜 저리도 엉뚱했나. 춘풍추상을 머리로만 알고 몸으론 거부했던 것일까. 액자가 부끄러울 일 아닌가.

대통령은 공분을 자아내는 몰상식 수준의 의혹이 줄줄이 쏟아지는데도 국민 눈높이와는 동떨어진 판단과 선택을 보였다. 중앙선관위와 검찰에 결정을 미루면서 “하나라도 위법이라는 판정이 있거나, 도덕성에서 국회의원 평균 이하라고 판단되면 사임시키겠다”고 한 것이 대표적이다. 문제의 본질을 못 봤거나 보고도 덮었던 셈이다. 그 본질은 법이나 평균에 있지 않다. 그에 앞서 춘풍추상의 잣대에, 물시어인의 기준에, 토라의 규범에 명백히 걸린다. 더 쉽게는 상식에, 국민 눈높이에 걸린다. 왜 자명한 사실이 안 보였는지 혹은 덮었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청와대에 무엇이 결여됐던 것일까. 양파처럼 하나하나 드러난 언행 불일치가 참고 넘길 수준이 아니었다는 엄중한 인식이다. 김 원장은 국회의원 시절이던 2015년 인사청문회에서 ‘금융권 낙하산’ 의혹을 놓고 “관피아 막았더니 정피아 내려온다”고 호통을 쳤다. 그 당사자가 최근 ‘금융검찰’ 수장 감투를 썼다. 국민과 국가 얼굴에 먹칠을 한 블랙코미디였다. ‘로비성 외유’ 등의 의혹 메들리 또한 가관이었다. 정치권의 ‘말 따로, 행동 따로’ 증상이 아무리 심하다 해도 이토록 위선적인 행태까지 국민이 감내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럼에도 청와대는 시간을 끌었다. 제 발등을 계속 찍은 것이다. 대통령 인기가 높아 선관위 결론만 아니었으면 정면돌파가 가능했을지도 모른다고? 혀를 찰 수밖에 없다.

이승현 논설고문
‘전국책’에 적우침주(積羽沈舟)라는 사자성어가 나온다. 다른 풀이도 있지만 원래 ‘새털도 많이 쌓이면 배가 가라앉는다’는 의미로 쓰인 말이다. 김기식 사태는 새털처럼 가볍지도 않았다. ‘버티는 김기식보다 감싸는 청와대가 더 꼴불견’이란 원성마저 불거졌다. 앞으로도 이런 식이면 지지율 곡선이 어찌 변할지는 아무도 모른다.

문 대통령은 지난해 취임사에서 ‘기회는 평등하고, 과정은 공정하고, 결과는 정의로울 것’이란 수사를 남겼다. 그 화려한 수사에 감동했던 이들이 돌아앉고 있다. ‘내로남불’ 본색을 새삼 절감하게 돼서일 것이다. 오만과 독선은 금물이다. 청와대는 춘풍추상 액자를 돌아봐야 한다. 힐렐의 가르침, 공자의 가르침도 깊이 새길 일이다. 그것으로 부족하다면 신약의 ‘황금률’도 있다.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는.

이승현 논설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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