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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병주의역사의창] 조선왕실의 태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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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8-04-13 21:33:59 수정 : 2018-04-13 21:3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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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운 위해 ‘왕가의 태’ 소중히 다뤄
일제 훼손… 식민통치에 활용하기도
지난 3월 충남 서산시에 있는 ‘서산 명종대왕 태실(胎室) 및 비(碑)’가 보물 제 1976호로 지정됐다. 조선왕실의 태실 가운데서 최초의 보물 지정이라는 점에서 큰 의미를 갖는다. 조선왕실의 태실은 일제강점기인 1928년쯤 대부분 서삼릉으로 옮겨졌고 원형을 유지하고 있는 태실이 거의 없는데, 서산의 명종대왕 태실은 원형을 유지하고 있는 점을 인정받아 보물로 지정된 것이다.

예로부터 태(胎)는 태아의 생명력을 부여한 것이라 인정돼 출산한 뒤에도 태를 소중히 보관했다. 특히 왕실에서는 태가 국운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아 더욱 소중하게 다뤄졌다.

신병주 건국대 교수·사학
왕실에서 왕자나 공주가 탄생하면 그 태는 100번 정도 깨끗이 씻은 후 작은 항아리에 담았다. 이어서 기름종이와 파란 명주로 봉한 다음 빨간 끈을 묶어 밀봉한 후 다시 솜을 채워 넣은 큰 항아리에 담았다. 태를 보관한 항아리를 태옹(胎瓮)이라 하는데, 조선 분청사기의 원형을 잘 보여주는 태옹은 현재에도 국보나 보물급 문화재로 평가받고 있다. 태를 보관하는 공간인 태실(胎室)에는 태옹을 묻은 다음 석실을 조성했다.

태실의 조성에서 첫 번째 의식은 안태(安胎)였다. 명산에 태를 묻는 안태 의식은 생후 5개월째 되는 날에 행해졌다. 지관(地官)을 파견해 태실을 조성할 장소가 정해지면 왕실에서는 태봉출(胎奉出) 의식을 행하고 안태사를 위원장으로 하는 행렬이 태봉을 향해 출발했다.

안태 때 올리는 제물은 종묘제사 때에 준했으며, 안태 행렬이 도착하면 지방관들은 장태(藏胎)가 끝날 때까지 행사를 지원했다. 세종은 자식의 태를 한자리에 안치했는데, 현재의 경북 성주군 월항면 인촌리 선석산 아래에는 문종을 제외한 세종의 왕자 18명과 손자인 단종의 태실이 조성돼 있다.

태실이 조성된 지역은 계란형의 지표 높이 50~100m 정도 되는 야산을 골라 그 정상에 태를 매장했는데, 태실이 조성된 산을 태봉(胎峰)이라 했다. 현재에도 ‘태봉리’라 칭하는 지명들은 대부분 태실이 조성됐던 곳이다. 태실은 태옹을 묻고 석물로 안치했다. 석물은 원형이고 아래로 배수를 위한 구멍을 뚫었으며, 맨 위에는 태함(胎函)을 석물로 덮어 안치했다. 태실에는 왕세자의 경우 4인, 왕이나 왕비의 경우 8인의 수호군사를 두어 태실을 지키게 했다.

실록의 기록에는 태봉에 화재가 났다 해서 군수를 좌천시키거나 태봉 수호를 소홀히 한 이유로 지방관을 처벌한 내용이 나타나며, 조선시대에 제작된 지도 중 태실이 있던 지역에는 꼭 태실이 표기된 것을 확인할 수가 있다. 그만큼 왕실에서 태실을 중시했음을 볼 수 있는 사례이다. 1865년에는 어머니의 장지를 태조의 태실 내에 몰래 쓰고자 했다가 발각된 김치운이 황해도 백령도에 귀양을 간 기사가 있는데, 민간에서도 왕실의 태실이 조성된 곳에 태를 묻으면 가문이 흥기한다는 믿음이 있어 위험을 무릅쓰고 이런 일을 한 것으로 보인다.

현재 경기 고양시 원당동에는 조선왕실의 태실 비석 54위(位)가 안치돼 있다. 이곳에는 왕의 태실이 22위, 공주 및 왕자의 태실이 32위 도합 54위의 태실 비석이 있다.

태실의 비석에는 언제 어느 곳에서 이 태실이 옮겨왔는지가 비문에 새겨져 있는데 경남 사천, 경북 성주 등 전국에서 태실이 옮겨졌음이 기록돼 있다. 1929년 3월 D신문의 기록에는 조선왕실의 태실이 서삼릉으로 옮겼다는 짤막한 기사가 보여 일제강점기에 전국의 태실을 파헤친 뒤 태항아리 등을 서삼릉 지역으로 옮겼음이 나타난다. 일제는 왕실과 지역민의 연결고리가 되는 태실을 없앰으로써 조선인들이 왕실을 생각할 여지를 아예 없앤 것이다.

서삼릉에 옮겨진 공동 태실은 일본 천황에게 참배하는 신사의 모습을 띠게 하여 식민통치를 위한 도구로 활용되기도 했다. 명종대왕 태실이 보물로 지정된 것을 계기로 조선 왕실에서 태실을 조성했던 의미와, 전국에 산재했던 태실의 원래 소재지에 대한 관심도 커지기를 기대한다.

신병주 건국대 교수·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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