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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연국칼럼] 증오는 증식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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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8-03-29 21:54:03 수정 : 2018-03-29 21:5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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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폐 청산은 부패 없앨 수 있어도
행복한 대한민국 만들진 못해
증오 버리고 포용의 손 뻗어야
‘통합과 공존’의 세상 열릴 것
오랜만에 옛 친구를 만났다. 대학 동기였으니 40년 지기인 셈이다. 그가 대학에 들어갈 무렵, 유신정권은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마침내 독재정권은 무너졌으나 또 다른 독재의 싹이 움트기 시작했다. 친구는 난생처음 데모를 했고, 계엄군에 잡혀가 두들겨 맞았다.

한 달 후 친구는 풀려났다. 세상은 그새 많이 달라져 있었다. 계엄군이 대학 캠퍼스에 진주했고 정문엔 탱크가 서 있었다. 친구는 자신이 꿈꾸던 공직은 물론이고 회사 취업도 할 수 없었다. 그의 청춘은 미래의 희망조차 품기 힘든 안갯속이었다. 6·10민주화 바람이 짙은 안개를 밀어내기 전까지는.

배연국 논설실장
그 친구가 입을 열었다. “요즘 말하기가 겁이 나. 모임에 나가면 정치 얘기는 피하고, 사람들의 성향이 어떤지 먼저 살핀다니까.” 젊어서는 시국 이야기를 꺼내기 전에 중앙정보부나 정보과 형사가 없는지 주위를 둘러봤지만, 요즘은 참석자들 중에 혹시 나와 지역이나 정치 성향이 다른 사람이 없는지 훑어봐야 한다는 것이다. 과거 몇몇에 국한되던 경계의 대상이 국민 전체로 확산될 정도로 갈등과 분열이 커졌다는 걱정이었다.

분열의 진앙지는 문재인정부의 적폐 청산이라는 게 친구의 진단이었다. “물론 썩은 부위는 당연히 도려내야지. 하나 증오로는 폐단을 제거할 수 있지만 우리가 꿈꾸는 세상을 구현할 순 없네. 사정의 칼로는 악을 도려낼 수 있어도 선한 세상을 만들진 못하지. 그건 사랑만이 가능하다네. 관용과 포용이 없는 민주주의는 독재만큼이나 위험하네.”

친구는 중국 파릉선사의 옛 일화를 들려주었다. 제자가 묻자 선사가 답했다. “취모검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산호 가지마다 달빛이 주렁주렁 걸렸구나.” 취모검은 털을 칼날에 대고 훅 불면 두 조각이 날 정도로 예리한 칼이다. 출가한 승려는 날카로운 지혜의 칼을 얻어 단번에 유혹을 끊어내려 한다. 해탈의 경지에 오르려고 힘든 고행을 마다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런 지혜를 얻었다고 진리의 세계로 곧장 입장할 수 있는 건 아니다. 산호 가지에 걸린 달빛처럼 부드러운 사랑을 가슴에 품어야 하기 때문이다. 타인과 아픔을 함께하는 자비심이 없다면 지혜가 태산처럼 많다 한들 대체 그것을 어디에 쓰겠는가.

사람들은 정의의 칼로 세상의 불의를 모두 베어버리고 싶어한다. 불의를 제거하기만 하면 반듯하고 행복한 나라가 탄생할 거라고 믿는다. 그렇지 않다. 칼은 부패와의 전쟁에서 요긴하지만 평화로운 세상을 건설하진 못한다. 빨리 칼을 거두고 쟁기로 만드는 게 상책이다. 넬슨 만델라는 그 이치를 알았다. 그는 대통령에 오르자 300년간 인권유린을 일삼은 백인들에게 증오의 칼 대신에 포용의 손을 내밀었다. 과거 자신을 학대했던 교도관들을 대통령 취임식에 초대한 만델라는 “원한을 버리지 않으면 몸은 자유로워도 마음은 여전히 감옥에 있는 것”이라고 외쳤다. 흑백이 하나 되는 ‘통합의 남아공’은 거기서 시작되었다.

증오는 감옥을 둘러싼 벽과도 같다. 상대를 미워하면 그와는 단단한 벽이 생긴다. 미움은 미움을 부르는 식으로 무한 증식된다. 종국에는 국민 전체를 마음의 벽으로 갈라놓을 것이다. 그러니 정부의 적폐 청산도 이제 손익계산서를 들여다볼 시점이 되었다. 적폐 청산이 아무리 중요할지라도 통합과 공존이란 목적 가치를 앞설 수는 없는 법이니. 온 나라에 흥건히 고인 증오와 적개심을 어찌할지 깊이 고민해야 한다.

“저는 감히 약속드립니다. 2017년 5월10일, 이날은 진정한 국민 통합이 시작되는 날로 역사에 기록될 것입니다.” 문재인 대통령 취임사의 한 토막이다. 이상은 만델라처럼 높았으나 현실은 남아공의 통합과는 거리가 멀었다. 외려 갈등은 커졌고 통합은 왜소해졌으며 국민은 더 찢어졌다.

유년시절 ‘우리의 소원은 통일’을 애창하던 친구의 지금 소망은 하나의 대한민국이다. 이질적인 북과 하나 되자면 남쪽에서 우리끼리 먼저 하나가 돼야 한다는 생각에서다. 그 소망은 과연 이루어질 수 있을까. 40년 지기의 시름이 끝없이 깊어가는 봄날이다.

배연국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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