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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에 ‘폭력의 굴레’ 씌우는 세상 꼬집다

입력 : 2018-03-29 21:02:20 수정 : 2018-03-29 21:0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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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정희 시인, 열네 번째 시집 ‘작가의 사랑’ 펴내 “태어날 때 선택하지 않은 운명 때문에 폭력을 가하고 공격하는 발정난 짐승의 세상을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거기서 시를 써왔으니 엄청난 슬픔과 상처투성이인 거죠. 마침 우리나라도 혁명처럼 불어닥친 것과 맞닥뜨렸지만 실은 저는 30여년 전부터 제도적 관습으로 여성을 차별하고 여성 생명을 타자로 보는 이런 문제들을 수도 없이 많이 이야기했어요. 심지어 정신대 문제도 여성 몸을 성 도구로 보는 남성 시각부터 반성해야지, 가해자 피해자 따지는 비판은 그 뒤에 이루어져야 할 정치적 계산이라고 말했죠. 그런 삭막한 계산 아래에서는 생명에 대한 소중함을 일깨울 수 없습니다.”

활달한 시풍으로 생명, 그중에서도 특히 여성의 왜곡되지 않은 본연의 모습을 시로 써온 문정희(71) 시인이 열네 번째 시집 ‘작가의 사랑’(민음사)을 펴냈다. 시집 출간을 계기로 전화로 만난 그녀는 어느 젠더로 태어날지 스스로 선택하지 않은 운명에 차별과 폭력의 굴레를 씌우는 세상을 높은 목소리로 성토했다. 그녀가 이런 목소리를 시에 담아온 건 본인의 말처럼 오래된 일이다. 이번 시집에서는 탄실 김명순(1896~1951)을 위한 진혼가 ‘곡시(哭詩)’에 그 오래된 마음을 다시 쏟아 넣었다.

열네 번째 시집을 펴낸 문정희 시인. 그는 “살다 보니 맨땅에서 언어를 찾아보려고 발버둥 치는, 웃음과 눈물 사이를 더듬거리는 늙은 코미디언 같더라”면서 “그래도 살아 있으니 아름답다”고 말했다.
세계일보 자료사진
“꿈 많고 재능 많은 그녀의 육체는 성폭행으로/ 그녀의 작품은 편견과 모욕의 스캔들로 유폐되었다./ 이제, 이 땅이 모진 식민지를 벗어난 지도 70여 년/ 아직도 여자라는 식민지에는/ 비명과 피눈물 멈추지 않는다./ 조선아, 이 사나운 곳아, 이담에 나 같은 사람이 나더라도/ 할 수만 있는 데로 또 학대해 보아라./ 피로 절규한 그녀의 유언은 오늘도 뉴스에서 튀어나온다./ 탄실 김명순! 그녀 떠난 지 얼마인가./ 이 땅아! 짐승의 폭력, 미개한 편견과 관습 여전한/ 이 부끄럽고 사나운 땅아!”

이화전문을 나온 여성으로 한국전쟁 직전 해방공간에서 간첩이라는 죄목으로 총살형을 당한 김수임(1911~1950)을 두고는 “서구 언론이 동양의 마타하리라 하지만/ 그녀는 하늘 아래/ 사랑을 몸으로 실천하여/ 완성을 이룬 여자/ 그것 말고 더 큰 명예가 없다는 듯이/ 기꺼이 사라진/ 애인이라는 이름의 여자”라고 썼다. 이처럼 선명한 어조로 여성 현실을 토로하는 한편에는 여전히 시인 특유의 솔직하고 생명력이 넘치는 시편들이 가득하다.

“비행기가 곧 이륙할 시간/ 따스한 이 살로 언제 다시 만날까요/ 시간은 맹독을 품어/ 검은 흙이 우리의 침대가 되겠지요// 내 몸은 이미 당신의 뼈와 살로 된 신전/ 지상에 살아 있는 한/ 이 신전에는 더 이상/ 어떤 신도 들어설 곳이 없을 거예요.”(‘공항의 요로나’)

멕시코 전설에 나오는 우는 여인이라는 의미의 ‘요로나’에 뜨거운 사랑을 투사한 시인은 그러나 이제 그것이 ‘쓸쓸한 유머’임을 안다. “남은 술잔을 두고 일어서는데/ 그가 돌연히 끌어안으며/ 깊이 속삭인다/ 아이 러브 유!/ 가만! 이런 유머는 처음이다/ 순간 공항이 휘청했다”면서 “고백이 기쁜 게 아니라/ 이것이 얼마나 즐겁고 쓸쓸한 유머인가를/ 알아듣게 된 것이 기뻐서/ 쿡쿡 웃음을 삼키며 비행기에 올랐다”고 시인은 쓴다.

문정희는 “살아보니 웃음과 눈물 사이를 더듬거리고 있는 모습이더라”면서 “맨땅에서 언어를 찾아보려고 버둥거렸는데 고독이니 슬픔이니 언어들이 다 실존을 표현하기에는 미흡했고 공간을 넓히기 위해 징검다리를 건너듯 세계를 떠돌아보았어도 다 꽝이요 폐허였다”고 말했다. 시인은 “웃음과 눈물 사이/ 살기 위해 버둥거리는/ 어두운 맨땅을 보았다/ 그것이 고독이라든가 슬픔이라든가/ 그런 미흡한 말로 표현되는 것을 알았을 때/ 나는 그 맨땅에다 시 같은 것을 쓰기 시작했다”고 ‘늙은 코미디언’에 썼다. “서정의 얇은 머플러로 어깨를 덮고/ 때로 시인처럼 리듬을 탔지만/ 상처를 교묘히 숨기고/ 긴 그림자를 갖고 있었지만/ 나의 옷은 허사(虛辭)로 쉬이 낡아갔다/ 오직 나만의 슬픔과 기쁨으로 짠 피륙은 없을까”(‘나의 옷’)라고 쉼 없이 자신을 벼리는 문정희의 시 쓰기에 대한 저주와 축복은 이렇게 이어진다.

“산다는 것은/ 거미줄을 타고 오르는 것/ 곡예를 하듯 오르고 또 올라가 보면/ 아무것도 없지/ 허공뿐이지// 산다는 것은/ 시를 쓰는 것은/ 거미줄을 타고 허공을 오르는 것이라고// 거미줄에는 이슬 몇 알이 전부/ 하지만 그 거미줄과 이슬이/ 어느 거대한 건축보다 부동산보다/ 더 아름답게 보이는/ 저주받은 비극의 눈을/ 그 축복을 시로 쓰네// 나는 시를 쓰네/ 나는 시를 사네”(‘나는 거미줄을 쓰네’)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jhoy@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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