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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다시 사람] "모든 성폭력은 권력형 성폭력…미투는 인권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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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8-03-17 11:30:00 수정 : 2018-03-17 15:5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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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경 한국성폭력상담소장 인터뷰/“판사 말고 판사부인 되라” 말에 문제의식 / 차별 근원 알고 싶어 여성학 전공 / 1991년 국내 첫 성폭력상담소 개소 / 미투는 ‘인권 침해 당했다’는 문제제기 / ‘공작설’ 김어준 피해자에 사과해야 / 피해자 우는 모습 집중하는 언론도 반성을 / 잘못도 가해자 몫, 수치심도 가해자 몫 / 적극적 합의 없는 성적 접촉은 성폭력 /타인 의사 마음대로 해석하지 않아야
초등학교 입학 전, 시골에 살 때였다. 할아버지가 물을 떠오라 해서 물을 가져갔더니 할아버지 친구가 옆에 있었다. 할아버지 친구는 꿈을 물었다. 그는 판사가 되고 싶다고 답했다. 그랬더니 할아버지 친구는 “여자가 무슨 판사냐, 판사 부인이나 되라”고 했다. 어린 마음에도 뭔가 부당하다고 느꼈다. ‘이건 아닌데.’

학창 시절, 늘 남자가 반장이었고 여자는 부반장에 그쳤다. 가정 수업 때에는 “강간은 절대 이뤄질 수 없다” “예전에 일본 장수가 (조선 여자의) 손목을 잡으면 손목을 끊었다”고 교육받았다. ‘이건 아닌데, 이건 아닌데.’

삶에서 체감해온 차별, 부당함의 근원을 알고 싶었다. 여성학과에 진학했다. 그는 그곳에서 가부장제 등의 ‘언어’를 접했다. 자신이 그 동안 부당하게 생각했던 게 설명될 수 있고 그 원인과 배경, 구조도 알게 됐다.

이미경 한국성폭력상담소 소장의 이야기다. 이 소장은 1991년 동료들과 함께 국내 첫 성폭력 상담소를 만들고 27년 동안 수많은 성폭력 피해자들을 만나 왔다.

특히 21년 전 자신을 강간한 이웃집 아저씨를 살해한 사건(1991)과 12년간 의붓딸을 성폭행한 아버지를 남자친구와 함께 살해한 사건(1992) 등을 겪으며 그 의미를 체감했다.

사회를 바꾸고 있는 미투(Me too) 열풍으로 한창 바쁜 시간을 보내고 있는 이 소장을 지난 15일 서울 마포구 사무실에서 만났다. 창밖에서 들어오는 햇볕이 따뜻했다. 다음은 이 소장과의 일문일답.

―안희정 전 충남지사의 사건은 충격적이다.

“전국 성폭력상담소들과 함께 지원하고 있다. (안 전 지사의 성폭행 의혹을 폭로한) 피해자를 방송에서 보거나 직접 만나보니 그가 얼마나 진심을 갖고 말에 얼마나 진심이 묻어나는지 느낄 수 있었다. 그가 이야기하는 성폭력 피해는 분명하다고 믿는다.”

―정봉주 전 의원과 프레시안은 치열한 진실 공방 중인데 어떻게 생각하는지.

“사실 관계를 자세히 모르지만, 피해자가 자신이 피해를 입었다고 얘기하고 있고 증거 제시를 하고 있는 것으로 안다. 진실은 밝혀질 것이다. 안타까운 것은 진보 쪽에 계신 분들이 추구하는 가치를 실현하는 과정에서 성 문제를 등한시한 점이다. 그것은 (그들이 추구하는 가치와) 떨어져 있는 문제가 아니다. 사람을 어떻게 대하고 사회가 어떻게 나아갈 지에 대해 굉장히 중요하게 다뤄져야할 가치라고 생각한다.”

―정치권 미투에 앞서 고은 시인, 김기덕 감독, 이윤택 연출가 등 문화계에서 먼저 미투가 쏟아졌는데.

“연극이나 영화, 문학 등 장르별로 특성이 있다. 각각의 종사자들이 작업하는 환경 모두 다르지만, 공통적인 게 있다. 그건 사람을 대하는 태도다. 고은 시인이 했던 행동들은 입에 담기 힘들 정도로 정말 믿어지지 않는다. 한 사람만 얘기했다면 말하는 사람이 잘못됐을 것이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비슷한 피해 사례들이 매일 상담소에 상담전화로 혹은 직접 찾아와 눈으로 귀로 접하고 있는 일이다.”


―문화계 성폭력의 원인은 무엇인가.

“최고의 위치라고 하는 것이 주는 권력이 있다. 그들의 눈 밖에 벗어나면 자신이 꿈꾸던 예술 세계에서 길이 막힌다. (이윤택 연출가를 가르키는 듯) 실제 안마를 하지 않으면 배역이 주어지지 않고 다른 극단의 심사위원으로 와 말을 안좋게 하는 등 영향력이 있었다. 극단 내의 문제가 아니라 이 분야에서 활동할 때 평판으로 앞길을 막을 수 있다. 굉장한 위협이다. 인생을 걸고 길을 택한 사람들이다. 그들에게 이런 권력으로 성적으로 침해하는 건 인생 전체에 대한 엄청난 침해다.”

―배우 조민기씨는 극단적인 선택을 해 또다른 충격을 줬다.

“안타깝다. 조민기씨의 성폭력을 말한 학생들은 그가 자살하기를 바라면서 이야기하지 않았다. 누구도 그런 결말에 대해서는 가슴 아파한다. 문제는 그들이 받았던 피해가 없어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오히려 더한 주변의 따가운 시선까지 견뎌야 한다. 사람을 죽음에 이르게 했다는 죄책감도 느낄 것이다. 그래서 ‘이 사건이 변곡점이 되지 않겠느냐’는 질문을 많이 받았다. 그런 질문은 사실 미투 운동을 그만두게 하려는 의도가 섞인 프레임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저버릴 수 없다. 그럼에도 상담소에는 피해 상담이 계속 들어오고 있다. 다양한 곳에서 말하기가 계속되고 있다. 누구도 막을 수 없다. 피해자들이 앞으로 겪을 일을 생각해보라. 가해자의 극단적인 선택은 안타깝지만 어떻게 보면 이후에는 그런 상황이 되지 않도록 가야한다. 자기 잘못을 사죄하고 응당한 처벌받을 일이 있다면 응당한 처벌을 받고 다른 사람으로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주는 사회가 돼야 한다.”

―미투 열풍 속에서 김어준씨는 ‘공작설’을, 조기숙씨는 ‘사이비 미투론’을 각각 제기했는데.

“김어준씨는 미투를 선언한 많은 피해자들에게 사과해야 한다. 발언은 미투에 참여한 이들을 굉장히 폄훼한 것이다. 그들이 누군가의 조종에 의해 자신들의 피해 사실을 드러냈다고 보는 것 자체가 진실을 외면하는 거다. 그렇게 밖에 피해자의 목소리를 듣지 못하는지 안타깝다. 조기숙씨 발언은 그가 미투를 어떻게 규정하고 있는지를 드러냈다고 본다. 그는 ‘권력형 성폭력’만 미투의 대상이 된다고 말했다. 모든 성폭력은 권력형 성폭력이다. 조금 더 힘을 가진 사람이 덜 가진 사람에게 성적으로 인권을 침해하는 게 성폭력이다. 사회적으로 성공한 사람들에게 한정하는 건 매우 제한적인 미투 해석이다. 피해자들이 자신을 드러내고 얘기하는 것은 굉장히 중요한 메시지가 있다. ‘개인 문제뿐만 아니라 더 이상 피해자가 나와서는 안된다’ ‘우리 사회가 변화해야 한다’는 굉장히 중요한 메시지를 담은 말하기다. 두 사람은 이 부분을 이해하고 깨달아야 한다.”

―한국의 미투가 세계의 미투의 공통점과 차이점은 무엇인가.

“들불처럼 일어난 게 한국 미투의 특성인 것 같다. 언론에는 특정 사람들의 미투만 보여지고 있지만, 수많은 미투 참여자가 있다는 걸 잊어선 안 된다. 상담소도 대책위를 하면서 굉장히 큰 마음의 짐이 있다. 소위 보통 사람들의 말하기에 대해 우리가 어떻게 대응해 가야 하는지, 극히 일부 유명한 사람들의 사례만 보여지는 건 또다른 누군가를 제외시키고 있다는 점에서 반성해야 한다. 그들의 목소리를 어떻게 들을지, 그들의 요구를 어떻게 풀어갈지를 고민해야 한다.”

―일각에선 미투 운동이 너무 고발 위주로 과격하게 흐르고 있다고 볼멘소리도 내는데.

“‘왜 피해자들이 자기 얼굴을 드러내놓고 말해야 하는가’ ‘왜 우리 사회가 그들을 몰아붙였는가’라는 질문을 먼저 해야 한다. 누가 자기가 입은 피해를 공식적으로 드러내놓고 말하고 싶겠는가. 우리 사회가 피해자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지 않았다는 점을 되돌아봐야 한다. 그들의 심정을 우리 사회가 헤아려야 한다. 특히 TV에 출연한 피해자들을 보면 ‘어디서 저런 용기가 나왔을까’ ‘그들이 이야기하는 것을 우리가 잘 살려야 하겠구나’ 하는 경외심까지 느껴진다. 한번의 해프닝으로 치부해선 안 된다. 그들의 고통과 분노를 넘어서야 한다. 우리 사회가 그들이 온몸으로 이야기하는 것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곳곳에서 미투 이야기를 하고 자기를 돌아보고 하는 것이 미투 운동의 희망이다.”

―‘2차 가해 또는 2차 피해’ 논란도 불거지고 있다. 어떤 유형이 있고 어떻게 고쳐야 하나.

“물리적 또는 언어적인 성폭력을 1차 피해라고 하고 성폭력에 대한 잘못된 통념이나 인권 감수성 부족으로 인해 피해자를 비난하고 의심하는 언행을 하는 게 2차 피해다. 2차 피해 유형은 다양하다. 형사사법절차에서 보면 자신이 피해자인지 가해자인지 모를 정도로 모멸적인 순간이 많다. 왜 도망치지 않았느냐거나 혹시 (성폭력을) 유발하지 않았느냐고 질문하는 태도는 피해자의 말을 의심하는 문제점이 있다. 직장 내에서 피해자에 되레 불이익 조치를 하고 은근하게 괴롭힘을 주거나 왕따를 시켜 결국 피해자가 견디지 못하고 회사를 그만두게 하는 사례도 2차 피해다. 요즘음 인터넷 상에서 SNS나 댓글 등을 통해 비난과 의심을 마구 쏟아내고 거짓을 날조하고 마치 사실인 양 유포해 피해자에게 엄청난 고통을 주는 것도 2차 피해다.”



―언론도 반성해야할 점이 많은데.

“언론도 피해자의 우는 얼굴만 찍거나 제목을 선정적으로 달고 카더라 통신을 빗대 은근하게 기사화한다. 언론이 과거 큰 역할을 해왔는데, 왜 선정적 보도에 매달리는지 모르겠다. 피해자에게 터뜨리는 플래시도 굉장히 불편하다. 피해자가 용기있게 여기까지 걸어온 당당한 모습을 찍어달라. 피해자가 울어야 된다는 생각을 하지 말아 달라. 심지어 상담소에서 우는 연기를 요구하는 취재진도 있었다. 이렇게 하면 안 된다.”

―미투 운동의 본질이 무엇인가.

“인권 존중이다. 남녀 성 대결이 절대 아니다. 힘을 가진 사람이 상대적으로 약한 사람에게 성적 언동을 통해 그 사람의 인권을 침해하고 자존감을 땅에 떨어뜨리는 행동은 없어져야 한다. ‘저 사람이 좋아서 했다’는 식으로 의사소통 왜곡을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진정 상대편으로부터 적극적인 합의를 받고 성적 행위를 했는지 생각해봐야 한다.”

1991년 4월. 이 소장은 동료와 선후배 등 57명과 함께 각자 10만원씩을 내 서울 서초동에 7.5평 오피스텔을 마련, 한국성폭력상담소를 열었다. 상담소는 후원을 바탕으로 2000년대초 현재의 서울 마포구 성산중학교 옆으로 옮겼다.

―상담소는 어떤 계기로 시작하게 됐나.

“대학 졸업 후 강의를 하며 동료들과 의기투합했다. 한국에 성폭력 상담소가 없는데 우리가 만들어보자고, 여성학이 실천학문인데 우리가 실천해보자고 다짐했다. 8개월을 준비하고 개소했다. 그때가 1991년 4월이다.”

이 소장 등은 서울대 조교 성희롱 사건 등에 공동대책위를 꾸려 대응하면서 사회 및 제도 변화 가능성과 피해자 회복 가능성을 확인했다고 한다. 이 소장 등은 2017년까지 27년 동안 총 8만1866회 성폭력 상담을 실시했다. 상담소에서는 전화가 오면 상담을 통해 심리적 지원을 하고 원할 경우 의료적 지원이나 법률 지원도 펼친다. 조사연구나 교육, 홍보 활동도 하고 정부 정책 모니터링도 하며 국제 연대활동도 적극적이다.

―27년간 8만여건의 성폭력 상담을 해왔다고 했는데, 최근 변화나 특징이 있다면.

“꾸준히 상담이 들어오고 있다. 27년간 일해온 경험을 보면 피해자 권리의식이 많이 바뀌었다. 예전에는 자신의 잘못이라는 자책과 주변에서도 말하지 말라고 하는 권유가 많았지만, 최근에는 자신의 권리를 찾으려고 하는 의식들이 보인다. 잘못도 가해자의 몫이고 수치심도 가해자의 몫이라고 하는 전반적인 사회적 흐름이 올라오고 있다. 굉장히 큰 변화이고 희망이다.”

―가해자가 되지 않기 위해 주의해야할 점은 무엇인가.

“남성뿐만 아니라 남녀 모두 피해자를 의심하고 비난하지 말 것, 그것이 가장 중요하다. 타인을 존중하고 타인의 의사를 마음대로 해석하지 말아야 한다. 데이트 성폭력은 오해에 의한 성폭력이 많다. 노(No)라고 말하지 않았다고 해 예스(Yes)는 아니다. 여성들은 맥락을 중요시한다. 여성들은 싫다고 말했을 때 상대방이 얼마나 무안해 할지도 고려한다. 말하지 않고 가만히 있는다고 해 그것을 동의했다고 보지 말라. 그것이 상대방을 존중하고 배려하는 인권의식이다. 성폭력은 조두순 등 ‘괴물’들이 저지르는 게 아니다. 대부분은 피해자들이 아는 사람, 좋아하고 존경하고 항상 수시로 만나는 사람들에 의해 피해를 받는다. 성폭력 예방은 괴한으로부터 자신을 지키는 게 아니다. 상대방과 적극적으로 합의하지 않으면 성관계나 접촉을 하지 않는 것을 철칙처럼 갖고 있어야 한다. 또 시민으로서 지하철 성추행을 보고 눈감아선 안된다. 가해자들이 또다시 그런 일을 저지르지 않도록 행동하는 시민이 돼달라. 행동하는 시민의식이 중요하다.”

―인생의 터닝포인트가 있다면.

“여성학을 공부했던 것이 첫 번째이고, 한국성폭력상담소를 시작한 게 두번째이다. 활동가로서 인간 이미경으로서 인생의 터닝 포인트다. 여성주의자, 페미니스트가 된 것이 제 삶에 굉장히 큰 의미가 있었다. 아이를 낳고 가정을 꾸린 것도 포함되겠다.”

김용출·하정호 기자 kimgija@segye.com
영상=서재민 기자

◇이미경 소장 프로필
△이화여자대 대학원 여성학 박사(2012) △이화여자대 아시아여성학센터 연구위원 역임 △한국성폭력상담소 이사 및 소장(2002~2009, 현재) △<글로컬 시대 아시아여성학과 여성운동의 쟁점>(2016) <성폭력에 맞서다(사례·담론·전망)>(2009) 등 공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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