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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찬제의책읽기,세상읽기] 자기 운명의 주인이 되는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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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8-03-12 21:02:05 수정 : 2018-03-12 21:0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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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 ‘화두’서 레닌 최후 이야기도 주목/‘유령’에 휘둘릴 때 개인 존재 가치 폄훼
‘광장’에서 ‘화두’에 이르기까지, 분단시대를 대표하는 작가 최인훈은 자기 운명의 주인이 되는 삶에 관심이 많았다. 이런 자기 운명에의 의지는 코기토 철학 시대의 상상적 의지에 값한다.

자전적 요소가 많은 장편 ‘화두’에는 작가 조명희의 이야기가 주요하게 등장한다. 조명희는 1930년대 소련의 당내 투쟁의 와중에서 반역자로 몰려 희생됐다. 인간다운 이성의 기획은 좌절되고, 비이성적인 먹이사슬의 농간에 의해, 그 곡절에 의해 희생된 조명희는 환상 속에서 주인공에게 이렇게 말한다. “자기를 빼앗기면 이 도시처럼 이렇게 된다네.(…) 너 자신의 주인이 되라.(…) 빛이 있을 때 빛 속으로 걸어라.”

‘화두’에서 레닌의 최후에 관한 이야기도 주목된다. ‘신의 죽음’이라는 제하에, 레닌이 1922년 뇌일혈로 쓰러진 후부터 사망하기까지의 마지막 나날을 기록한 기사는 주인공에게 충격적이었다. 비참한 언어장애 속에서 고작 ‘어머니’, ‘간다’ 등 몇 개의 단어만을 말할 뿐이었던 레닌과 ‘제국주의론’의 저자 레닌의 차이에서, 레닌구성체의 붕괴를 목도했기 때문이다. 이런 기록을 접하면서 주인공은 레닌처럼 망실되기 전에, 조명희의 화두처럼 자기 자신의 주인일 수 있을 때 세계의 ‘옳은 맥락’을 찾아내서 기록해 둬야겠다고 결심한다. “나 자신의 주인일 수 있을 때 써둬야지. 아니 주인이 되기 위해 써야 한다. 기억의 밀림 속에 옳은 맥락을 찾아내어 그 맥락이 기억들 사이에 옳은 연대를 만들어내게 함으로써만 나는 나 자신의 주인이 될 수 있겠다. 그 맥락, 그것이 ‘나’다. 주인이 된 나다.”

그러나 자기 운명의 주인으로 살기가 어디 그리 쉬운 일인가. 접속 시대의 소설가 김영하는 ‘자기 운명의 주인’ 담론의 현실성에 회의적인 태도를 보인다. 그는 자기 운명의 주인으로 살지 못하는 소비 자본주의 사회의 일상을, 그 파편들을, 놀이 충동으로 서사화한다. ‘빛의 제국’에서 그는 “생각한 대로 살지 않으면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될 것”이라는 폴 발레리의 시구를 원용하면서, 사는 대로 생각하는 사람의 이야기, 혹은 그 존재론을 그리게 된 것은 그런 까닭이다. 이 소설의 주인공은 장기 남파 간첩이다. 북한에서 남한으로 이식된 그는 아내에게조차 자신의 정체를 숨겨야 할 정도로 분열된 존재 조건 속에서 산다. 모든 것은 거짓이고, 주위 사람과는 다른 시간과 공간에 갇혀 산다. 이를 있으면서도 없고, 없으면서도 있는 유령의 존재론이라고 부르면 어떨까.

자기 운명의 주인으로 살지 못하고 유령처럼 살 때는, 불가피하게 또 다른 유령 혹은 더 힘센 유령의 억압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그러한 유령에 억눌리고 휘둘릴 때 개인의 존재 가치는 폄훼되고, 상처는 깊어만 간다. 그러니까 각자가 자유로운 선택의 가능성이 보장된 상태에서 자기 맘과 몸의 주인으로 살 수 있는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조건과 분위기가 존중되어야 하리라. 정녕 자기 운명의 주인으로 살기를 실천하는 이는, 남도 그 운명의 주인이라는 가치를 지켜주는 사람이다. 남의 운명의 주인성을 빼앗으면 내 운명의 주인성도 박탈될 수 있음을 명심하는 이다. 개인만 그런 게 아니다. 조직이나 민족, 국가 차원에서도 그렇다. 모든 영역과 관계에서 서로 자기 운명의 주인으로 살 수 있도록 배려하고 지켜주는 분위기가 확산, 심화되길 바란다.

우찬제 서강대 교수·문학비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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