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법부의 ‘블랙리스트 의혹’ 3차 조사 이후 최악의 상황을 가상해 봤다. 엉뚱한 시나리오가 아니다. 지난달 23일 3차 조사단이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의 PC를 열기로 했을 때 법조계 인사들이 공공연히 점쳐본 상황이다. 2차 조사 때 열지 못한 임 전 차장의 PC와 행정처 내부 파일 760건에 대한 디지털 포렌식이 시작된 지 일주일이 넘었다. 조사 책임자인 안철상 법원행정처장과 조사위원들이 이미 인화성 강한 자료를 확보하고 고민 중일지 모를 일이다.
이 시나리오가 현실화한다면 김 대법원장은 일생 최대 선택에 직면할 것이다. 적정한 수위에서 마무리 지을지, 새 의혹을 조사할 4차 조사단을 구성할지, 검찰의 칼을 빌릴지 어려운 선택을 해야 한다. 벌써 법관들 사이에서는 “끝장을 봐야 한다”는 얘기까지 나온다고 한다. 끝장이 형사처벌까지 의미하는지, 그 끝이 양 전 대법원장일지도 모른다. 이 상황만큼은 김 대법원장으로서도 피하고 싶을 것이다.
일부에서는 사법부가 정치판을 닮아간다고 지적한다. “재판이 곧 정치”라고 한 판사까지 있기에 나오는 지적일지 모른다. 국제인권법연구회 모임 축소 논란에서 비롯된 사태는 사법행정권 남용에서 블랙리스트 논란으로, 이제 적폐 청산으로 향하고 있다. 과거 행정처에서 일한 법관들은 죄다 무슨 죄를 지은 것처럼 비치기도 한다. 어느 누구도 제어할 수 없는 흐름을 타고 가는 형국이다.
행정처는 사법부 인사와 예산, 행정을 총괄하는 조직이다. 능력을 검증받은 엘리트 법관들이 가는 곳이니 승진 코스였다. 행정처 법관들은 백면서생 법관들과 달리 그래도 세상 물정을 조금 안다. 예산이나 법안과 관련해 행정부와 입법부에 아쉬운 부탁도 하는 자리다. 정기 인사와 재임용 심사 등을 위한 판사들 평판 수집도 업무의 일부다. 그들로서는 다소 지나쳤을지 몰라도 블랙리스트로 불리는 건 억울하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절대 인권법연구회라든지 저와 친분 있는 사람을 요직에 둔다든지 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김 대법원장이 지난해 9월 인사청문회에서 ‘코드인사’ 우려와 관련해 다짐한 말이다. 하지만 김 대법원장은 두 달도 채 안 돼 법원행정처 법관들을 내보내고 인권법연구회 출신 법관에게 인사총괄을 맡겼다. 정기인사 시기가 아니었다. 단지 전임 대법원장 체제에서 행정처 요직을 차지했다는 이유로 좌천성 인사를 당했다는 말이 나온다. 법관 인사의 독립을 얘기할 때 중요하게 언급되는 예측가능성과 거리가 있는 인사라는 지적이다. 김 대법원장이 뜻이 맞는 법관들 중심으로 법원행정처를 이끌고 가려는 것 같다. 한 법조계 인사는 “또 다른 줄세우기라는 비난을 받을 만하다”며 “6년 후 다른 대법원장이 물갈이 인사를 되풀이하면 뭐라고 할 것이냐”고 반문했다.
박희준 사회부장 |
법조계에서는 재판의 독립을 실질적으로 보장하고 재판의 질적 향상과 균질화를 이뤄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최근 위원회를 구성하기는 했다지만 ‘김명수 코트’의 사법개혁은 뜨뜻미지근하기만 하다. 이제 김 대법원장이 출구전략을 마련할 시점이다. 마침 8∼9일 취임 후 첫 전국 법원장 간담회가 열린다. 김 대법원장과 법원장들이 허심탄회하게 의견을 나누고 현명한 방안을 마련하길 기대해 본다.
박희준 사회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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