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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저임금 폐해 외면한 정부 태도
종말론자의 광신적 믿음과 흡사
대선공약 무오류 환상에 빠지면
잘못된 정책 수정 기회 사라질 것
1992년 10월28일을 기억하는가. 다미선교회 등 시한부 종말론자들이 지구에 종말이 온다고 예고한 날이다. 예수가 재림하고 신도들이 하늘로 올라가는 휴거(携擧)가 일어난다는 것이다. 직장을 그만두거나 학업을 중단하는 신도들이 속출했다. 심지어 몸이 가벼워야 하늘에 잘 올라간다고 해서 무리하게 살을 빼다 죽는 이마저 있었다. 마침내 그날이 왔다. 신도들이 하늘나라로 가기 위해 흰옷을 입고 기다렸지만 휴거는 없었다.

미국에서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1954년에 한 사이비 교주가 “조만간 대홍수가 일어나지만 나를 믿고 따르는 사람들은 비행접시로 구출된다”고 외쳤다. 운명의 날이 도래했으나 홍수는커녕 비 한 방울 떨어지지 않았다. 거짓이 탄로 났다면 당연히 교주는 달아나고 교회는 문을 닫아야 옳다. 이것이 우리가 믿는 이성의 힘이자 합리적 결론이다. 현실은 정반대였다. 그들의 믿음은 더 견고해졌다. 신도들은 “우리의 믿음 덕분에 세계가 구원받았다”는 교주의 말에 홀려 축제까지 벌였다. 여기서 나온 심리학 이론이 ‘인지부조화’이다. 자신이 믿는 것과 실제 현상 간에 괴리가 발생하면 이를 일치시키기 위해 자기합리화를 시도한다는 것이다.

배연국 논설실장
뜬금없이 웬 휴거소동이냐고? 최근 정부의 최저임금 대응방식을 보고 광신도의 모습이 눈에 어른거린 까닭이다. 올해부터 16.4% 파격 인상된 최저임금의 부작용은 이미 전방위로 확산된 상태다. 경제 약자인 알바생과 아파트 경비원들이 먼저 일자리에서 쫓겨나기 시작했다. 국제통화기금(IMF)마저 우리 정부와의 연례협의 결과 보고서에서 최저임금의 급격한 인상이 고용 악화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경고 메시지를 날렸다. 최저임금 인상이 민간소비를 확대해 고용을 창출하는 ‘일자리 휴거’는 일어나지 않는다는 국제기구의 공식 판정이었다. 이쯤 되면 정책의 오류를 인정하고 보완책 마련에 나서야 마땅하다.

정부는 전혀 다른 길을 택했다. 김동연 경제부총리는 “청년일자리 대책을 위해 추경 편성도 배제하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지난해 청년실업 해소를 위해 11조원을 쏟아붓고도 별 효험을 보지 못한 추경 카드를 다시 꺼내겠다는 얘기다. 오류에 눈을 감고 자기 신앙만 강화하는 광신도 행태를 빼닮았다.

자기합리화의 근저에는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믿고 싶은 것만 믿는 확증편향이 자리한다. 자신의 생각과 부합하는 사실만 가까이하고 그렇지 않은 것은 멀리하는 것이다. 외부와의 교류보다는 자기들끼리의 소통이 중시되면서 집단사고에 빠질 위험이 있다.

인지부조화의 예화로 자주 등장하는 것이 이솝 우화의 ‘여우와 신 포도’이다. 여우 한 마리가 길을 가다가 높은 가지에 매달린 포도를 봤다. 포도를 따먹기 위해 여러 번 펄쩍 뛰었으나 너무 높이 달려 있어 발에 닿지 않았다. 결국 포기하고 돌아가던 여우는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저 포도는 너무 시어서 맛이 없을 거야.”

문재인정부 출범 이후 신 포도 신세로 전락한 것은 한둘이 아니다. 원전, 대기업, 노동개혁은 비근한 예일 뿐이다. 판별 기준은 문 대통령의 대선공약이다. 공약 목록에 올라 있지 않은 정책들은 시어서 먹을 수 없는 메뉴로 간주된다. 그것이 정말 맛있는 포도냐, 그렇지 않으냐? 그런 진실 따위는 중요치 않다. 탈원전으로 전력 수급에 이상이 생기고 법인세 인상으로 기업 투자가 줄어도 가속페달만 밟는 판이니. 한국GM 사태에서 보듯 천문학적 복지비와 고용 세습으로 호사를 누리는 귀족 노조들만 진짜 포도 흉내를 내고 있다. 심리학 역사에 길이 남은 인지부조화의 전형이다.

무리한 반시장 정책이 우리 경제에 휴거의 기적을 가져올 수 없다는 사실은 명백해졌다. 지난 열 달간의 실험을 하고도 아직 깨닫지 못했는가. 대선공약만 보지 말고 공약집 밖의 현실을 봐야 한다. 정부가 엉뚱한 곳에 신 포도 딱지를 붙이는 사이 진짜 포도나무의 밑동이 잘리고 줄기가 말라죽고 있다. 5000만 국민이 영원히 포도맛을 보지 못하는 날이 올지 모른다. 광신의 미몽이 국가의 재앙을 부르고 있다.

배연국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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