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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진의청심청담] 기망기망, 대한민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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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8-02-26 23:38:09 수정 : 2018-02-26 23:3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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北 핵과 미사일은 국가적 힘 아닌 / 선군정치의 허장성세에 불과 / 南도 물질선 서구 따라잡았지만 / 정신문명선 아직 주인의식 부족 중국 주(周)나라를 문화적으로 정초한 인물은 주공(周公)이다. 문왕(文王)이 주나라를 건국했다고 하지만 실은 그의 아들인 무왕(武王)이 은(殷)나라 주왕(紂王)을 정벌하고 문왕을 태조로 추대했다. 주공은 문왕의 아들로서 조카인 성왕(成王)을 도와 문물을 정비하고 나라를 반석 위에 올려놓음으로써 공자가 꿈에도 그리는 문화영웅이 됐다. 동양의 최고 경전인 주역(周易)의 괘사를 쓴 사람은 문왕이고, 효사를 쓴 사람이 주공이라고 한다.

나라를 세운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주공이 나라를 정초할 때 떠올린 글귀가 바로 ‘기망기망(其亡其亡)’이다. ‘망할까, 망할까’를 염려하면서 나라의 기초(禮樂: 요즘은 헌법과 법률)를 다져야 사직을 오래 보존할 수 있음을 말한다. 대한민국도 여러 선각자의 고심 끝에 건국된 나라이다. 그런데 요즘 정치가들 중에는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공공연히 부정하는 이가 적지 않다. 혹자는 망함을 염려하기보다는 반체제를 정의로 착각하는 이도 있다. 스스로 망함을 자초하는 ‘자망자망(自亡自亡)’이 염려될 정도이다.

평창올림픽을 둘러싸고 남북한의 교류와 정치적 이벤트를 보고 있노라면 북한이 남한을 능멸하고 있는지, 남한이 북한을 포용하고 있는지 불분명하다. 남한이 북한에 끌려다니고 있다고 보는 이도 적지 않다. 천안함 폭침의 배후로 알려진 김영철(통일전선부장)의 방남은 아무래도 북한의 오만과 실험이 도를 넘은 것 같다. 천안함 유가족의 한을 풀어주지는 못해도 불을 붙이고서야 남북대화가 순조롭게 될 리가 없다.

남북한은 아직 제대로 된 근대국가가 아니다. 남한의 경우 세계 최고의 산업·물질문명을 구가하고 있는데도 거기에 걸맞은 정신문화와 도덕을 수립하지 못한 채 방황하고 있다. 오늘의 ‘혼란한 민주주의’는 조선을 망하게 한 성리학과 다를 바가 없다. 한국인의 수준만큼 민주주의가 되고 있는 것일까. 몸은 산업사회에 살면서도 정신은 아직 농업사회에 살고 있는 중민(衆民)들이 많다. 세계적으로 볼 때 농업지역(유라시아대륙)이 사회주의로 물든 것은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중세와 근대를 판가름하는 동서양문명을 회고해보면, 동양권의 공산사회주의는 산업으로서의 농업과 정치적 집단주의의 합작처럼 느껴진다. ‘중세문화의 꽃’을 피운 송(宋)나라의 성리학을 국가통치철학으로 도입한 조선은 구한말에 이르러 위정척사의 깃발 아래 산업화의 세계적 추세를 읽지 못해(대원군의 쇄국정책) 결국 나라를 망하게 했다. 이는 성리학 자체가 잘못됐다기보다는 시대의 변화를 읽지 못한 지식권력 엘리트들의 무능력 탓일 것이다.

성리학은 송나라의 멸망을 막지는 못했지만, 그 후 원나라·명나라·청나라에 이르기까지 영향력 있는 통치철학으로 생명력을 유지했다. 아마도 성리학은 농업사회를 기반으로 한 경전 중의 백미일 것이다. 그렇지만 사농공상(士農工商)의 중세적 산업구조를 벗어나지 못했고, 근대의 상공농사(商工農士)의 구조에 대응하지 못해 동양권을 패배와 식민의 나락에 빠뜨렸다. 산업사회 이후의 상공농(商工農)의 순서를 제대로 이해한 일본의 지식인만이 간신히 산업화와 탈아입구(脫亞入歐)를 동시에 성공함으로써 일본제국을 건설하는 역사적 행운을 얻을 수 있었다. 한국과 중국은 약 100년 뒤 20세기 중후반에 들어서야 산업화의 대열에 끼어든 게 오늘의 모습이다.

오늘날 제정신으로 살고 있는 한국인이 몇 명이나 될까. 국가의 분열은 사사건건 드러나고 있고, 세계적 조롱거리가 되고 있다. 강대국들은 우리의 분열을 지배의 기회로 삼고자 한다. 부익부 빈익빈 심화와 정규직·비정규직 문제 등 자본주의의 문제점을 많이 안고 있다 하더라도 자유가 없이 빈곤국가로 전락하는 사회주의국가보다는 낫지 않은가. 문제를 슬기롭게 극복하면서 전열을 재정비해야 할 때이다. 제한된 토지와 노동을 생산 기반으로 한 중세농업사회와 자본과 상업과 공업을 기반으로 한 근대산업사회는 모든 면에서 우선순위가 거꾸로 되는 경우가 많다. 

박정진 평화연구소장·문화평론가
성리학과 마르크스주의의 잘못된 만남이 ‘평등-노예적 도덕주의’로 국민을 몰고 가서 ‘자유-산업(상업)-해양국가’로 나아감으로써 산업화와 민주화에 성공한 한국을 분열의 도가니에 몰아넣는다면 우리는 다시 빈곤의 절망에 빠질지도 모른다. 북한의 핵과 미사일은 솔직히 오늘날 산업적 힘도, 국가적 힘도 아닌 선군정치의 허장성세에 불과한 것이다. 남한도 산업화와 물질문명에서는 서구를 따라잡았지만 정신문명에서는 아직 역량과 주인의식이 부족하다.

앞에서 말한 ‘기망기망’이라는 말은 주역 비(否=天·地)괘의 다섯째 효사에 나온다. 이 효사는 막혀 있는 비색(否塞)함을 그치는 괘로서 동인(同人=天·火)괘가 기다리고 있어 미래가 어둡지만은 않다. 인물(大人)만 있으면 민족의 대동단결도 가능하다. 그래서 “기망기망(其亡其亡) 계우포상(繫于苞桑)”이라 했다. “망할까, 망할까 우려하여 총생(叢生)하는 뽕나무에 매어둔다”는 뜻이다. 그런데 지금 우리의 뽕나무는 어디에 있는 무엇인가. 혈맹인 미국은 북한의 핵 포기를 위한 사상 최대 대북제재 조치를 진행 중이다.

남북한의 통일과 공생의 문제를 스스로 해결할 수 있는 지혜와 역량의 결집이 아쉽다. 통일과 평화를 이끌어갈 주인이 없는 게 문제이다. ‘기망기망(其亡其亡)’이 희망을 주는 기망기망(其望其望)으로 반전할 묘안은 없는 것인가?

박정진 평화연구소장·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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