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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NDi’라는 기구가 있다. 소외 질병과 맞서 싸우기 위해 국경없는의사회 주도로 2003년 만들어진 비영리기구다. 이런 기구가 왜 필요한가. 돈 많고 기술 좋은 글로벌 제약사들이 개 치매약까지 내놓으면서도 못 사는 나라들의 사정에는 관심을 갖지 않기 때문이다. 시장 실패에 대처하는 기구인 셈이다.

수면병이 좋은 예다. 서서히 죽음을 부르는 열대성 풍토병으로, 아프리카 사하라사막 이남 지역을 위협한다. 치료제는 있다. 암치료제로 개발된 ‘에플로니틴’이다. 1990년대 한때는 기적의 약으로 통했다. 하지만 제약사는 1995년 생산을 중단했다. 돈이 안 돼서였다. 황당한 것은 수면병 환자들이 다시 속수무책으로 죽어나갈 때 같은 물질이 여성용 제모제 성분으론 계속 생산됐다는 사실이다. 털을 없애는 제모제는 황금알 낳는 거위여서 대접이 달랐다.

히포크라테스 선서는 의학 윤리를 담고 있다. 핵심은 생명 존중이다. 그 연장선상에 1948년 제네바선언, 1964년 헬싱키선언도 있다. 하지만 의약계 현실은 좀 다르다. 수면병 치료제를 없앤 제약사는 국제기구 등의 고발·홍보 공세에 떠밀려 마지못해 생산을 재개했다. ‘울며 겨자 먹기’였을 것이다.

국내에선 요즘 변비약이 품귀라고 한다. 배변 활동을 돕는 변비약을 생산하던 국내 3개 제약사 중 2개사가 채산성 악화로 생산을 접었다. 마지막 남은 1개사도 고민 중이란 소식이다. 약값이 생산원가를 한참 밑도니 팔수록 손해인 구조여서다. 이번 건은 수면병과는 좀 다르다. 시장 실패가 아니라 정부 실패에 가깝다. 당국이 무리한 수준으로 약값을 후려친 결과인 까닭이다. 변비, 안 겪어본 사람은 모른다. 환자들은 어디에 하소연해야 하나.

변비약은 빙산의 일각이다. 건강보험공단은 최근 건보재정이 올해 ‘1조2000억원 적자’로 전환할 것으로 전망했다. 정부 방침대로 ‘문재인 케어’가 올해부터 본격 작동하면 약값 인하 압박의 후폭풍이 불게 마련이다. 건보 보장성이 확대된다고 환호만 할 계제인지 의문이다. 앞으로 약 진열대에서 사라질 것은 변비약만이 아니다. 이것은 DNDi가 개입할 문제도 아니다.

이승현 논설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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