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 올림픽은 프랑스의 피에르 쿠베르탱 남작의 노력이 결실을 맺어 1896년 그리스 아테네에서 처음 열렸다. 인류 평화의 제전이라는 구호를 내걸었지만 14개국 240여명의 선수가 참가하는 데 그쳤다. 1908년 영국 런던 올림픽 때 22개국 2000여명이 참가하면서 제 모습을 갖췄다. 우여곡절이 많았다. 제1, 2차 세계대전 기간에는 올림픽 개최가 취소됐다. 올림픽 정신을 돌아볼 겨를이 없었다. 냉전시대에는 1980년 소련 모스크바 올림픽과 1984년 미국 로스앤젤레스 올림픽이 반쪽 대회로 열렸다가 1988년 서울 올림픽 때 북한 등을 제외한 동서 양 진영 국가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한국이라면 6·25전쟁 참화만 연상하던 세계인들이 한국의 경이로운 발전상을 다시 보게 됐다. 한국의 국가 브랜드 가치를 높였다.
분단국가가 단일팀을 구성해 참가한 것은 1956년 이탈리아 코르티나담페초 동계올림픽 때 동·서독이 처음이다. 이전에는 국가마다 하나의 올림픽위원회만 인정하는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원칙에 따라 서독만 출전할 수 있었다. 단일팀 구성에 대한 반발은 공정한 선수 선발과 경기력 강화라는 논리로 잠재웠다. 1964년 일본 도쿄 올림픽 때까지 동·서독 선수들은 같은 유니폼을 입고 같은 깃발 아래 행진해 독일인들에게 통일의 염원을 불러일으켰다.
남북한도 단일팀 구성을 위한 회담에 나섰다. IOC 가입을 바라는 북한이 적극적이었다. 1963년 스위스 로잔의 IOC 본부에서 열린 남북 체육회담에서 단가를 ‘아리랑’으로 정하고 깃발은 IOC가 제시한 ‘오륜 마크 아래 KOREA 표시’에 동의했지만 단일팀 구성은 무산됐다. 1989년 남북 체육회담에서 흰색 바탕에 하늘색 한반도 지도가 들어간 깃발에 합의했다. 2000년 호주 시드니 올림픽 개·폐막식 공동 입장 때 아리랑이 울려 퍼지고 한반도기가 휘날렸다.
박완규 수석논설위원 |
중국 작가 루쉰은 소설 ‘고향’ 말미에 이런 구절을 남겼다. “생각해 보니 희망이란 본시 있다고도 없다고도 할 수 없는 거였다. 이는 마치 땅 위의 길과 같은 것이다. 본시 땅 위엔 길이 없다. 다니는 사람이 많다 보면 거기가 곧 길이 되는 것이다.”
사람이 많이 다니면 길이 생긴다. 세계로 향하는 길이 열리면 북한도 언젠가는 바뀔지도 모른다. 실낱같은 희망이라도 살려나가야 한다. 평창올림픽 이후엔 한·미 연합군사훈련, 북한 핵·미사일 개발 등 난제들이 기다리고 있다. 우리의 국가적 역량이 시험대에 올랐다.
박완규 수석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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