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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 한잔 나누며] “우리밀 처한 현실 어려워도 포기할 순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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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8-01-21 21:48:26 수정 : 2018-01-21 22:0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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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성호 ‘우리밀 가공공장 영농법인’ 대표 “우리 밀 수매 중단 등으로 재고가 넘치지만 그래도 우리 밀을 포기할 수는 없어요.”

‘우리 밀 살리기 운동’의 산증인 최성호(76) ‘우리 밀 가공공장 영농법인’ 대표는 21일 “대기업의 영업과 수입 밀의 득세로 우리 밀이 어려움을 겪고 있다”며 이렇게 말했다.

전남 구례군 광의면에서 만난 최 대표는 “우리 밀이 처한 현실이 안타깝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그는 우리 밀이 추위에 노출돼 움츠러드는 어린아이처럼 자꾸 왜소해지고 있으나 희망은 여전하다고 강조했다. 최 대표의 우리 밀 지키기는 오랜 사랑의 산물이다. 우리 밀 살리기 운동에 주력한 농민운동가인 그는 “생사의 갈림길에 선 우리 밀을 다시 살리는 삶을 살았다”고 자평했다.

그는 ‘농민운동 1세대’로 1970년대 초부터 수세폐지운동 등에 매진하며 농민과 농촌의 권익 향상에 매진했다. 우리 농촌을 살리는 게 전통과 정신을 이어가는 일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농민운동에 나섰던 그가 우리 밀에 관심을 가진 것은 1980년대 말이었다.

최성호(76) 대표가 우리 밀 살리기에 뛰어든 배경과 성과 등을 설명하고 있다.
구례=한승하 기자
1세대 농민운동가들이 활동을 접고 고향으로 돌아가기로 결정한 1989년 농민운동에 참여한 이들은 새로운 의제에 눈을 떴다. 이들이 선정한 3대 의제는 생명운동(무농약), 도시와 농촌의 더불어 살기 운동(생협), 우리 밀 살리기 운동이었다. 최 대표는 이중 우리 밀 살리기 운동에 공감했다. 쌀·보리와 함께 제2의 주식이었지만, 수입물량이 급증하면서 국내 생산 기반이 파괴된 밀의 재배를 늘리기로 결심한 것이다. 더구나 1983년 정부가 수매를 폐지하면서 우리 밀의 설 자리는 더욱 위축된 상태였다.

지인들은 그의 선택을 반대했다. 당시 일부 일터에서 노동자와 직원들의 임금을 미국산 수입 밀가루로 지급할 정도여서 우리 밀을 짓는 것은 ‘제 무덤 파기’나 마찬가지였다.

최 대표의 이야기를 따라가 보면 그의 평생에 걸친 우리 밀 지키기는 ‘전투’와 흡사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는 뜻을 같이한 이들과 함께 우리 밀 종자 한 가마를 샀다. 이를 전남·북과 경남의 농민운동 활동가들이 14㎏씩 나눠 가졌다. 최 대표는 “우리 밀 살리기 운동이 시작된 것”이라고 당시를 회고했다.

최 대표는 고향 마을인 구례의 구만마을로 돌아와 자신의 밭에 밀 종자를 파종했다. 2년 후인 1991년 19만8000㎡ 규모의 밭에 농사를 지었다. 이웃들과 함께 40㎏ 5000여 가마의 밀을 수확했다. 문제는 판매였다. 수입밀에 비해 우리 밀은 가격 경쟁력이 떨어졌다. 정부와 지방자치단체의 지원도 없었다. 찾는 사람은 없고 쌓이는 가마니 숫자만 늘어났다.

누군가는 밀 공장을 차려야 했다. 최 대표가 나서기로 했다. 구례지역 50개 농가가 직접 공장을 짓기로 했다. 최 대표는 땅을 기증하고 농가들이 돈과 일손을 보탰다. 여기에 전남도를 설득해 9000만원을 지원받았다. 이렇게 해서 1992년 12월 370㎡ 규모의 밀 가공공장을 세웠다. ‘우리 밀 살리기 운동 제1공장’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곡물 분쇄기로 가동을 시작한 공장 운영이 정상궤도에 오르기까지는 시련과 시행착오가 이어졌다. 밀 가공에 대한 지식도 없고 원료곡을 확보할 자금도 부족했다. 그렇지만 앞으로 나아갔다. 구례에 이어 전남 무안, 경남 합천 등에 제2, 3의 가공공장을 세웠다. 그는 “그동안 수입 밀가루로 국내 밀 농업이 초토화한 현실에서 일군 소중한 성과였다”며 “정부조차 외면했던 상황에서 식량 무기화에 대비하며 우리 밀을 지키고 키워냈다”고 자부했다.

말을 이어가던 그가 한숨을 지었다. 우리 밀 지키기에 나선 지 10년이 못 돼 곧장 위기가 도래한 것이다. 그는 “1990년대 말 외환위기가 결정타였다”며 “구례 1공장을 빼고 모두 부도를 맞았다”고 아픈 기억을 끄집어냈다. 그나마 구례공장은 최 대표와 영농법인의 직원, 출자 농가들의 결단 덕분에 살아남을 수 있었다. 이들이 한뜻으로 10년 동안 월급과 배당금을 포기한 것이다.

공장들이 문을 닫자 이번에는 악순환이 똬리를 틀고 최 대표를 압박했다. 우리 밀 수매가 줄면서 원곡료 부족에 어려움을 겪어 공장의 정상적인 가공이 힘들어진 것이다.

그런 와중에서도 구례공장은 백밀가루와 통밀가루 외에도 ‘밀벗’을 브랜드로 다양한 제품을 만들어냈다. 밀벗을 브랜드로 해서 2분도 통밀, 국수, 호분건빵, 통밀라면을 만들었다. 새싹을 활용한 밀싹국수, 우리 밀 차 등도 구례공장의 효자제품으로 거듭났다. 다행히 외환위기를 거치고 2001년 이후엔 영업흑자를 달성했다.

지금은 전남·북과 경남지역에서 생산되는 우리 밀의 대부분을 수매한다. 연간 약 2800t(7만 가마)을 수매해 가공한 상품의 판매로 40억원 정도의 매출을 올린다.

최 대표는 “농민들에게 희망의 산물인 우리 밀로 2모작을 할 수 있어 1년에 두 차례 괜찮은 수입을 올린다”며 “소비자들의 우리 밀에 관한 인식이 높아졌고 국제 곡물 가격이 상승하면서 가격에서도 비슷해지고 있다”고 말했다.

정작 농민들이 꿈꾼 희망에 생채기를 낸 이들은 대기업 집단이었다. 최 대표는 “대기업은 우리 밀이 죽어갈 때 수입 밀로 많은 돈을 벌더니 지금도 국내 농업에 악영향을 끼치고 있다”고 강조했다. 그는 “우리도 대형 수입 밀과의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차별화한 아이디어 제품 개발에 노력해야 한다”며 “자신과 같은 농민들의 노력도 절실하다”고 밝혔다.

최 대표는 그간의 성과를 바탕으로 2008년 신지식인 선정과 농림부장관상, 2009년 구례군민의 상, 2010년 대산 농촌문화상 농업발전 부문 대상을 받았다. 두 차례에 걸쳐 전남도의원으로 활동할 때도 우리 밀 살리기는 그의 제1의 의정 주제였다.

구례=한승하 기자 hsh62@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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