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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의역사-1월22~28일] 총격 받은 차르의 초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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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8-01-22 00:04:33 수정 : 2018-01-22 11:23: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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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일전쟁이 한창이던 1905년 1월22일 러시아 군은 엉뚱한 데서 용맹을 과시한다.

수도인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그것도 차르의 동궁(冬宮) 앞에서 평화시위를 하는 노동자들을 향해 총을 난사한 것이다. 그래서 이날은 1000여명이 사망하고 3000여명이 부상한 ‘피의 일요일’이 되고 말았다.

이 사건은 오랜 모순이 폭발한 것으로 러일전쟁이 도화선이 됐다. 군수품 공장은 대폭 가동시키면서도 재정난으로 임금을 제대로 주지 않았던 것이다.

상트페테르부르크 최대의 금속 공장인 푸틸로프 공장에서 노조원들을 해고하자 공장은 파업을 하고, 이에 450여 공장의 노동자 15만명이 동조하는 식으로 파업이 확산됐다.

그러나 파업 노동자들은 차르를 존경하는 온건한 국민이었으며, 이들은 게오르기 가폰이라는 정교도 사제의 지도를 받고 있었다. 이에 이들은 ‘존경하는 차르’에게 호소하기 위해 동궁으로 행진을 한 것이다.

그들은 차르(니콜라이 2세)의 초상화와 정교의 성상인 이콘을 앞세우고 행진했다. “주여, 그분의 백성을 보호하소서”라는 황제찬가를 부르며….

하지만 그 응답은 총소리였다.

가폰의 기록을 보면 차르의 초상을 받쳐 든 시위대원이 쓰러지자 다른 사람이 받쳐 들었으나 그도 쓰러진다.

그 비극이 주는 의미는 현대인으로서는 상상키 어렵다. 그때까지 그들에게 차르는 하느님에 버금하는 존재였다.

그들의 삶이 어려워도 그것은 황제 탓이 아니라 황제 주변에 도사리고 있는 괴승 라스푸틴 같은 간신들 때문으로만 믿어왔다.

러시아 군은 그런 믿음에 총질을 한 셈이다.

이 사건은 요원의 불길처럼 번져 차르는 그해 10월 헌법 제정과 의회(두마) 설립을 선언하는 1차 러시아 혁명으로 마감했다. 그러나 한번 실추된 차르의 위상은 회복될 수 없었다.

그래서 13년 뒤에는 차르의 초상화가 아닌 몸이, 아니 로마노프 황실이 총을 맞는다.

양평(언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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