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검색

[단독]“막내라는 생각은 잊고… 달려라, 유빈!”

관련이슈 2017 월드컵

입력 : 2018-01-10 17:37:28 수정 : 2018-01-10 18:09:51

인쇄 메일 글씨 크기 선택 가장 작은 크기 글자 한 단계 작은 크기 글자 기본 크기 글자 한 단계 큰 크기 글자 가장 큰 크기 글자

[넌 할 수 있어!] “저도 첫 출전 땐 부담에 맘고생 ‘넘어지지만 말자’ 다짐 또 다짐/ 연습 때처럼 욕심 버리고 시합/ ‘막내 신화’ 계보 이어주길 기대”
‘한국 빙상 신화’ 김윤미가 여자 쇼트트랙 대표팀 막내인 이유빈에게 손팻말을 통해 응원의 메시지를 보냈다. 김윤미 제공
지난해 12월 중순 반가운 소식이 날아들었다. ‘한국 빙상의 신화’ 김윤미(38)의 수제자인 마메이 바이니(18)가 흑인 여성 최초로 미국 스케이트 올림픽 대표에 선발된 것이다.(세계일보 2017년 12월18일자 2면 참조) 오랜만에 1990년대 원조 ‘국민 여동생’의 소식을 접한 많은 사람들이 김윤미를 그리워했다. 김윤미는 1994 릴레함메르 동계올림픽 당시 불과 만13세 나이로 여자 3000m 계주에서 우승해 큰 인기를 끌었지만, 2002년 쇼트트랙 국가대표 은퇴 후 미국 유학길에 올라 이후 근황은 베일에 가려 있었기 때문이다.

수소문 끝에 이달 초 연락이 닿은 김윤미는 어느덧 ‘역대 동계올림픽 최연소 금메달리스트’에서 ‘세 아이의 엄마’가 돼 있었다. 미국 버지니아 주에 거주하는 그는 불과 2주 전인 지난해 12월27일 셋째 아이를 출산해 육아로 정신없는 하루를 보내는 중이었다. 얼마 전 한국에서 자신이 화제가 됐다는 사실도 전혀 모르고 있었다.
1994년 릴레함메르 동계올림픽에서 역대 최연소(만 13세) 금메달리스트가 된 ‘국민 여동생’ 김윤미는 지난해 12월 어느덧 세 아이의 엄마가 됐다. 김윤미(오른쪽)가 지난해 9월 두 아이와 함께 미국 워싱턴 국립동물원을 방문한 모습. 김윤미 제공

김윤미는 인터뷰에서 돌연 유학을 떠난 이유에 대해 “‘나도 대학생활 한 번 제대로 해보고 싶다’는 마음이었다”며 “훈련때문에 수업을 못 들은 게 항상 아쉬웠다”고 말했다. 그는 2004년 연세대학교 체육교육과 학사를 졸업했지만 같은 해 미국 메릴렌드 주 타우슨대에서 선수트레이너(Athletic Trainer) 전공으로 다시 학사과정을 밟았다. 선수트레이너는 현장에 스포츠의료를 접목해 선수들의 부상을 관리하는 재활 전문가이다. 

김윤미는 “체육교육과를 나오고 교생실습도 했었지만 사실상 ‘학창 시절’이 별로 없어서인지 체육 선생님보다는 프로 선수들을 위한 일을 하고 싶었다”라며 “선수 시절 제대로 된 치료나 재활도 없이 경기에 임해 결국 선수생명을 마감하는 이들을 보면 항상 마음에 걸렸다”고 설명했다. 그는 유학 생활을 “힘들었지만 행복했다” 한마디로 정리했다. 아무런 연고도 없는 미국에서 홀로 사는 게 외로웠지만, 은퇴 후 하고 싶었던 일을 마음껏 할 수 있는 시간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스스로 생각하고 결정하는 일들이 많아진 만큼 저 자신이 한층 더 성장할 수 있는 시기였다”고 덧붙였다.

지난해 12월 흑인 여성 최초로 미국 스케이트 올림픽 국가대표에 선발된 마메이 바이니는 김윤미가 2007년에 만나 걸음마부터 가르친 수제자이다. 김윤미(오른쪽)가 지난해 10월 미국 버지니아주 레스턴 지역 빙상장에서 바이니와 함께 사진을 찍고 있다. 김윤미 제공
대학을 다니던 중 김윤미는 버지니아 주 락빌 지역의 스피드스케이팅 클럽 ‘리딩 에지(Leading Edge)’의 코치를 맡았다. 그는 “고심 끝에 공부와 일을 병행하기로 했다.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영어를 배울 기회였다”며 “부족하지만 제가 가진 스케이트 기술을 꿈나무들에게 알려줄 기회이기도 했다”고 말했다. 바이니와의 운명적인 만남도 이때 이뤄졌다. 김윤미는 2007년 리딩 에지에 넘어온 바이니를 걸음마부터 차근차근 가르쳤다. 그는 바이니에 대해 “또래보다 체격 조건이 참 좋았다. 머리 하나는 더 컸다”며 “가끔 시합에 나가면 다른 코치들이 ‘나이를 속인 게 아니냐’고 묻곤 했다”고 회상했다. 이어 “훈련이 힘들 텐데도 곧잘 따라와 줬다. 당시에도 단거리 2∼3바퀴 훈련을 하거나 경기에 나서면 승부욕이 상당한 선수였다”고 덧붙였다.

1994년 릴레함메르 동계올림픽에서 역대 최연소(만 13세) 금메달리스트가 된 ‘국민 여동생’ 김윤미는 지난해 12월 셋째 아이를 출산했다. 사진은 김윤미(왼쪽)가 지난해 1월 가족과 함께 미국 워싱턴 링컨기념관을 방문한 모습. 김윤미 제공
김윤미는 2013년 한국에서 동갑내기 남편 장민석(38)씨와 결혼했다. 2011년 4월 귀국해 서울 내 한 병원의 운동치료사로 일하던 그는 이듬해 무릎 수술을 받은 장씨의 재활훈련을 도왔다. 김윤미는 “이때까지만 해도 호감만 있는 정도“라고 했다. 하지만 2013년 장씨는 반대쪽 무릎을 다쳤고 두 번째 재활에서는 김윤미와 결혼에 골인했다. 결혼 직후 김윤미는 미국으로 돌아와 사우스 플로리다 주립대에서 운동과학(Exercise Science) 석사를 마쳤고, 그 사이 아이가 둘이나 생겼다. 그는 지난해 4월 버지니아 주에 있는 도미니언 스피드스케이팅 클럽의 수석 코치로 부임해 다시 바이니와 합을 맞췄고, 11월까지 그의 평창행을 이끌었다.

고국에서 열리는 2018 평창동계올림픽을 앞두고 김윤미는 ‘막내 신화’ 계보를 이을 여자 쇼트트랙 대표팀 이유빈(17)에게 직접 편지를 썼다. 다음은 인터뷰 내용을 토대로 재구성한 김윤미의 응원 메시지다.

“이유빈 선수 안녕하세요. 저도 이유빈 선수처럼 어릴 적 오빠를 따라서 처음 스케이트를 탔어요. 태극마크를 단 첫 시즌에 올림픽에 출전하는 것도 저랑 같네요. 또 팀 막내라고 하니 더욱 마음이 갑니다.

한국에서 열리는 올림픽이라 잘해야 한다는 부담이 클 거에요. 하지만 올림픽이라는 ‘꿈의 무대’를 밟는 것 자체만으로도 큰 영광이라 생각해요. 안방 올림픽이라 시차, 환경 적응 과정도 없으니 해외 선수들보다 컨디션 조절도 수월할 거에요.

사실 올림픽이라고 특별히 다를 게 없다는 말을 해주고 싶어요. 잘 생각해보면 빙판 위 경쟁자들은 올림픽 이전에 월드컵에서도 몇 년을 같이 싸워본 선수들입니다. 올림픽이라고 더 긴장하거나 욕심을 부릴 필요도 없어요. 평소 시합, 연습 때처럼 매 순간 최선을 다한다면 분명 좋은 결과가 있을 거예요.

여자 쇼트트랙 국가대표팀 막내 이유빈이 10일 진천 국가대표선수촌에서 열린 ‘2018 평창동계올림픽대회 G-30 미디어데이’ 행사에서 화이팅 포즈를 취하고 있다. 진천=이재문 기자
이유빈 선수에게 어떤 조언을 해줄지 고민했어요. 하지만 이미 출중한 실력을 갖춘 선수에게 스케이트 관련 팁을 주기 보다는, 그냥 제 올림픽 경험을 들려주면 더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해요. 저는 제가 릴레함메르에서 계주를 뛸 거라곤 생각도 못 했어요. 당연히 언니들이 출전하겠거니, 저는 후보라고 생각했죠. 이제 와 돌이켜보면 연습 때마다 계주 고정 멤버였으니 마음의 준비를 할 법도 한데 말이죠.

본선 며칠 전에서야 제가 출전할 것을 듣고 걱정이 많았어요. 계주는 4명 다 잘해야 하는데 내가 실수하면 어쩌나… ‘넘어지지 말고, 연습때만큼만 하자’는 생각으로 트랙에 나섰죠. 골인까지 세 바퀴도 안 남은 상황에서 제가 (전)이경 언니를 밀어주며 중국을 앞질렀어요. 이어 마지막 주자였던 (김)소희 언니가 선두로 결승점을 통과했죠. 당장 기쁜 마음보다는 실수하지 않았다는 안도감이 컸어요.

1998 나가노동계올림픽에서는 계주 마지막 주자를 맡아 너무 부담됐어요. 막판에 선두 순위가 뒤집히기도 하고, 팀이 지고 있을 땐 마지막 주자가 역전해주길 바라는 마음도 잘 알았기 때문이죠. 올림픽 직전 부상을 당해 훈련이 쉽지 않았지만, 계주만큼은 실수 없이 제 몫을 해내자고 항상 다짐했어요.

1994 릴레함메르 동계올림픽 당시 만 13세이던 김윤미가 여자 쇼트트랙 3000m 계주에서 빙판 위를 질주하고 있다.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제공
결승전 마지막 두 바퀴를 남기고 제 차례가 왔어요. (안)상미 언니가 막판 무서운 스퍼트로 중국팀보다 먼저 저를 밀어줬고 저는 곧바로 안쪽으로 파고들어 중국을 앞지를 수 있었죠. 중국의 양양A가 반칙성 몸싸움을 걸어왔지만 그냥 물 흐르듯 흐름에 몸을 맡겼어요. 사실 그 두 바퀴는 어떻게 달렸는지 기억이 잘 안 나요. 시상식 전에 복도에 있는 모니터에서 리플레이를 보고 제가 어떻게 골인했는지 알았을 정도예요. 지금도 ‘어떻게 그때 안 넘어지고 계속 달렸지?’라는 생각이 들어요. 아이러니하게도 그 두 바퀴가 제 올림픽 인생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입니다.

이유빈 선수, 마지막까지 부상 조심하면서 최선을 다하길 빕니다. 팀에선 막둥이지만 경기에 나선 순간만큼은 막내 타이틀을 잠시 내려놓아도 괜찮아요. 계주는 결승전에서 한국 선수들끼리 마주칠 일이 없는, 스케이트 종목 중 대표팀 모두가 웃을 수 있는 유일한 종목입니다. 그동안 훈련한 기량을 200% 발휘하길 바라며 멀리서나마 진심으로 응원할게요.”

이동수 기자 samenumber@segye.com

[ⓒ 세계일보 & Segye.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피니언

포토

비웨이브 아인 '미소 천사'
  • 비웨이브 아인 '미소 천사'
  • 비웨이브 제나 '깜찍하게'
  • 정은지 '해맑은 미소'
  • 에스파 카리나 '여신 미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