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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의 안뜰] 따뜻한 두부요리에 둘러앉아 선비들 학문과 정치를 논했다

입력 : 2017-12-30 10:37:29 수정 : 2017-12-30 10:3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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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 연포회의 비밀
다산 정약용(1762∼1836)은 백성들이 사용하는 음식 용어에 대해서까지 중국식으로 제대로 써야 한다는 매우 교조적인 입장을 가지고 있었다. 가장 대표적인 용례가 ‘두부’다. 다산은 “우리나라 음식 이름 중에서 가장 많이 거론되는 것이 두부다. 그러나 사람들이 잘못 알고 자꾸 ‘포’(泡)라고 쓴다”고 했다. 사실 한자 ‘豆腐’(두부)는 북송 사람 도곡(陶谷·903∼970)이 965년에 쓴 책으로 알려진 ‘청이록’( 異錄)에 처음으로 나온다. 그러니 널리 알려진 한나라 유방의 손자 회남왕 유안이 만들었다는 주장은 명나라 때 조작된 역사다. 그러나 다산은 이런 사정을 알지 못했다. 그러다 보니 당대 최고의 학자인 다산마저 그런 주장을 펼쳤던 것이다.

두부의 ‘부’(腐)자는 동물의 젖을 응고시킨 것을 가리킨다. 치즈의 일종인 ‘유부’(乳腐)가 가장 대표적인 예다. ‘유부’에서 약간 썩은 냄새가 나기 때문에 ‘부’의 뜻은 부패와도 통했다. 그러나 ‘포’(泡)라는 한자는 액체가 응고한 상태를 가리킨다. 한족들이 북방 유목민의 ‘유부’를 모방하여 젖 대신에 대두로 만들었기 때문에 ‘두부’라는 한자 명칭이 생겨났다. 원나라 때인 고려 말에 두부 요리법이 한반도에 들어왔지만, 조선시대 사람들은 두부가 탄생한 비밀을 몰랐다. 두부를 만드는 과정만 보면 이 음식에 ‘腐’라는 한자를 왜 붙였는지 의아했을 것이다. 그래서 세조의 어의였던 전순의는 아예 두부를 ‘두포’(豆泡)라고 적었다. 조선시대 글자깨나 아는 선비마저도 두부를 ‘포’라고 불렀다. 

1766년 유중임(1705~1771)이 쓴 ‘증보산림경제·치선’에는 ‘연두부국 만드는 법(造軟泡羹法)’이 소개돼 있다. 유중임은 기름에 지진 두부를 닭국물에 넣고 간장으로 간을 맞춰 끓인다고 했다.
한식재단 제공
그렇다고 다산이 ‘포’라는 단어를 쓰지 않은 것은 아니다. 다만 한자를 바꾸어 썼다. 그는 한자 연포의 ‘泡’가 너무 상스러워서 굽는다는 뜻의 ‘포(炮)’로 바꾸어 시를 지었다. ‘연포회’의 한자는 ‘軟泡會’이다. 한자 ‘軟’은 부드럽다는 뜻이니, 연포회의 ‘軟泡’는 오늘날 말로 하면 ‘연두부’다. 즉 연포회는 글자 그대로 옮기면 연두부를 먹는 모임이다. 그러나 반드시 문자 그대로는 이해하면 안 된다. 조선의 선비들이 굳이 연두부를 먹으려고 모임까지 개최했을 리가 없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알려진 조선시대 연포회의 모습은 다산이 남겨 놓은 글에 근거를 둔다. 다산은 연포회가 주로 능원이나 사찰에서 개최되는데, 그곳에 두부를 잘 만드는 조포(造泡) 혹은 조포장(造泡匠)이란 직책의 요리사가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조선 왕실에서는 개국 때부터 불교를 탄압하면서도 각종 제향과 잔치에 쓰이는 대량의 두부를 조포사(造泡寺)로 지정한 사찰로부터 공급받았다. 조극선(趙克善·1595∼1658)이 15세부터 29세까지의 일기를 모은 ‘인재일록’(忍齋日錄)을 보면 갓 약관의 나이를 넘긴 조극선이 사돈 이씨와 ‘와사’(瓦寺)라는 절에서 10월 3일에 연포회를 갖자고 약속을 한다. 양반들이 약속만 한다고 사찰에서 연포회가 열리는 것은 아니다. 연포회의 경비를 마련하는 설판(設辦)을 정해서 주요 식재료를 마련하고, 그것을 해당 사찰에 미리 보내 연포회를 열겠다고 알려야 한다. 당연히 설판이 참석자들에게 통보도 했다.

절묘하게도 조극선의 일기보다 30여년 후에 나온 홍만선(1643∼1715)의 ‘산림경제·치선’(1715년경)에 연포회의 흥미로운 요리법이 나온다. 제목은 ‘연두부를 끓이는 법(煮軟泡法)’이다. “두부를 만들 때 단단하게 누르지 않으면 곧 연하게 된다. 이것을 잘게 썰어 한 꼬치에 서너 개 꽂는다. 흰 새우젓국과 물을 타서 그릇에서 끓이되 베를 그 위에 덮어 소금물이 빠져나오게 한다. 그 속에 두부꼬치를 거꾸로 담가 끓여서 조금 익었을 때 꺼낸다. 따로 굴을 그 국물에 넣어서 끓인다. 잘 다진 생강을 국물에 타서 먹으면 매우 부드럽고 맛이 매우 좋다.” 홍만선은 이 요리법을 민간의 것이라고 했다. 생각만 해도 침이 입속에 고인다. 

19세기 두부를 만드는 과정의 일부를 그린 김준근의 ‘두부짜기’.
독일함부르크민족학박물관 제공
그러나 10월 3일 ‘와사’ 연포회의 요리법은 이와 달랐다. 설판은 10월 2일 연포회 약속을 하면서 조극선에게 닭을 잡아오라고 시켰다. 아마도 자신은 콩을 마련할 계획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조극선은 3일 아침에 하인을 시켜 닭을 설판의 집으로 보냈다. 홍만선은 요사이 사람이 ‘오젓’이라 부르는 백하해(白蝦?)의 국물로 연두부국을 만든다고 했지만 조극선은 닭고기를 준비했던 것이다. 닭고기를 국의 베이스로 하는 요리법은 무려 150여년 뒤인 1766년에 쓰인 유중임(1705∼1771)의 ‘증보산림경제·치선’에 나온다. 이 책에서는 요리법의 이름을 ‘연두부국 만드는 법(造軟泡羹法)’이라고 적었다. 먼저 살진 암탉으로 국물을 만든다. 여기에 쇠고기 큰 것 한 덩어리를 넣는데, 이렇게 하면 국물맛이 더욱 좋다. 두부도 ‘산림경제’와 달리 반드시 단단하게 눌러서 만든 것이 좋다고 했다. 그러니 연포도 아니다. 조극선보다 한 세대 앞서 살았던 허균(1569∼1618)도 서울의 장의문 밖에 말할 수 없이 연한 두부를 잘 만드는 사람이 있다고 했다. 아마도 조선사람들의 두부 기호가 18세기에 와서 변했던 모양이다.

유중임은 이 단단한 두부를 숯불 위에 올려놓은 솥뚜껑에 기름을 많이 붓고 지진다고 했다. 이렇게 지진 두부를 닭 국물에 넣고 간장으로 간을 맞춘 다음, 생강 파 참버섯 표고 석이 등을 곱게 채를 썰어서 넣고 다시 끓인다. 또 그릇에 고깃국물을 조금 담아 곱게 썬 무와 밀가루를 조금 넣고 골고루 갠다. 여기에 계란 여러 개를 깨뜨려 넣고 빠르게 저어서 국물에 넣는다. 여러 재료가 골고루 섞이도록 5∼6번 끓어오를 때까지 끓인 다음에 떠서 먹는다. 잘 삶아진 암탉을 실처럼 가늘게 찧어 발긴다. 주발에 연포를 붓고 여기에 암탉고기 바른 것과 채 썬 계란을 올리고 초피가루와 후춧가루를 뿌려서 먹는다. 너무나 화려한 두붓국이다. 19세기 초반에 다산이 지은 시에서도 닭고기와 단단한 두부, 그리고 각종 버섯과 후추가 연포국의 재료로 쓰였다. 다만 스님이 살생을 할 수 없어서 젊은 선비가 닭고기를 썰어서 솥에 넣어서 끓였다고 했다. 그러나 조극선의 일기에는 이런 대목이 자세하게 묘사되어 있지 않다. 오히려 사찰의 스님들이 두부 만들기를 거부하여 연포회가 열리지 못할 뻔한 일도 있었다. 그러니 권력을 쥔 양반들이 막무가내로 연포회를 준비하라고 스님들을 겁박한 일은 18세기 이후에나 나타났던 일이다. 

주영하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
사실 조선시대 지방의 양반 가문에서는 집 인근의 사찰 스님들과 매우 좋은 관계를 맺고 있어야 했다. 과거시험에 응하는 사람들은 답안지로 쓸 종이를 직접 마련했던 당시에 종이를 못 구하여 응시조차 못한 선비도 있었다. 당시 대부분의 종이는 사찰에서 만들어졌기 때문에 수시로 방문하여 안면을 익히는 것이 좋았다. 종이뿐인가. 본격적인 과거시험 준비 역시 사찰의 암자가 적격이었다. 그러니 조선의 성리학자들은 불교를 억압하면서도 절묘하게 사찰을 이용하였다.

16세기만 해도 연포회는 담백한 음식인 소식(素食)을 먹는 선비들이 산사에서 학문을 논하는 일종의 워크숍이었다. 그래서 고기가 아니라 새우젓이 국물에 들어갔다. 그러나 연포회가 유행을 하면서 연포국에 닭고기가 들어갔다. 연포회를 빙자하여 업무를 방기한 채 산사나 능원에서 며칠씩 노는 관리들이 있어 조정에서 논란이 되기도 했다. 그런데 17세기 후반이 되면서 같은 문하의 선비들이 자주 모이다 보니 연포회는 세력화의 장소로 변해갔다. 연포회를 통해서 세력을 모으려는 파벌의 우두머리들이 닭고기는 물론이고 평소에 불법이었던 쇠고기까지 넣어서 연포국을 끓였다. 심지어 연포회를 연다고 하면서 사적 결사모임인 계를 조직하는 선비도 있었다.

결국 영조는 1754년 윤 4월7일 신하들과 산사의 연포회 문제를 거론하면서 폐단을 없애야 한다는 지시까지 내린다. 그랬던 탓일까. 19세기 초반 이후의 문헌에서 갑자기 연포회 기록이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 과유불급(過猶不及)이었던 것이다. 이것이 조선시대 연포회의 비밀이다.

주영하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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