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검색

[이배용칼럼] 언론의 시대적 소명 다시 생각할 때

관련이슈 이배용 칼럼 , 오피니언 최신

입력 : 2017-12-17 21:09:55 수정 : 2017-12-17 23:14:47

인쇄 메일 글씨 크기 선택 가장 작은 크기 글자 한 단계 작은 크기 글자 기본 크기 글자 한 단계 큰 크기 글자 가장 큰 크기 글자

대한제국 시기 발간된 신문에서 / 언론의 투철한 사명의식 발견 / 이 혼란기에 언론이 제역할 수행 / 희망의 새해 맞이하기를 기대 어느덧 다사다난했던 정유년 한 해가 저물고 있다. 요즈음 같이 대한민국의 앞날이 불분명한 시절 가장 종합적인 정보의 집산지로서, 언론의 역할이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하다.

그중 신문은 정보 공유와 소통의 장이고 역사의 기록물로, 먼 훗날 그 시대의 숨결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는 기초자료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정확하고 신속한 사실의 전달은 물론 시대의 담론을 담아내고 예리한 분석과 앞을 내다보는 나침반으로서의 신문 역할이 필요하다.

100여 년 전 일본을 위시한 외세의 압박 속에서 국가적 위기에 당면한 대한제국시기에 발간된 신문에서 언론으로서의 투철한 사명의식을 발견할 수 있다. 1896년 4월 7일 서재필이 ‘독립신문’을 창간한 것을 기점으로 우리나라에서는 민간신문의 시대가 시작됐다. 이로부터 1898년에는 순 한글 신문인 ‘협성회 회보’, ‘매일신문’, ‘제국신문(원명 뎨국신문)’ 창간에 이어 주로 지식층 계몽을 위한 국한문 혼용의 ‘황성신문’이 창간돼 국권수호와 의식계몽에 앞장섰다.

‘독립신문’은 최초의 순 한글 민간신문으로 창간됐다. 독립신문의 발간취지는 대중계몽에 주력해 근대적 시민의식을 불어 넣어 주었으며 한글 띄어쓰기도 처음으로 시도했다. 그해 7월 결성된 독립협회에서 진행된 시사문제에 대한 찬반 토론회도 신문에 실리면서 독립자강과 근대적 의식을 각성시켰다.

1904년 7월 18일 창간된 ‘대한매일신보’는 영국인 베델에 의해 발간됐는데, 처음에는 영문판 4면과 한글판 2면으로 편집됐다가 1905년 8월 11일부터 국한문혼용 신문과 영문신문을 분리 독립시켰다. 1907년 5월에는 전 국민의 계몽이라는 ‘대한매일신보’ 본래의 창간목적에 맞춰 한문을 모르는 일반 대중과 여성을 위해 국문판을 발간해 애국심을 고취시키고 교육과 여성계몽에 주력했다.

이들 대한제국기 신문은 정치·사회·경제 전반에 걸친 개혁을 단행해야 나라를 지킬 수 있다는 논조 아래 공정한 인재선발, 준법정신, 기술향상과 함께 실학정신의 필요성, 군대정비를 통한 무력증강, 경찰제도 합리화와 민생안정을 비롯해 명분보다 실리외교를 강조했다. 무엇보다 이들 신문은 국민적 단결을 바탕으로 한 애국심을 고취시켜 갈수록 노골화되는 일제에 적극 항거했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1905년 11월 17일 일제가 강제로 을사늑약을 체결하자 ‘황성신문’ 주필이었던 장지연은 11월 20일자 논설에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이라는 글을 써서 일본의 폭압에 굴복해 조약을 체결한 정부 대신을 신랄하게 공격했다. 이 글로 인해 장지연은 체포되고 신문은 정간됐으며, 정간된 지 3개월 뒤 속간됐으나 신문사의 운영진이 바뀌었다.

이배용 전 이화여대 총장·영산대 석좌교수
한편 1907년 2월 국채보상운동이 대구에서 광문사 사장 김광제, 부사장 서상돈을 주축으로 일어나 전국으로 확산되고 있을 때, 대한매일신보사는 “국채 1300만원을 우리 대한제국이 갚지 못하면 나라가 망할 것인데, 국고로는 해결할 도리가 없으므로 2000만 인민들이 3개월 동안 흡연을 폐지하고 그 대금으로 국고를 갚아 국가의 위기를 구하자”고 발기취지를 밝혔다. 이어 ‘제국신문’, ‘만세보’, ‘황성신문’ 등이 보도하자 각계각층에서 광범위한 호응이 일어났다. 그러나 일본의 획책으로 국채보상운동을 주도했던 총무 양기탁을 횡령죄로 뒤집어씌워 구속하는 바람에 운동 자체가 끝내는 좌절됐다.

이처럼 대한제국기에 발간된 신문은 글자 형태를 한글판, 영문판, 국한문혼용 등으로 구성해 다양한 독자층에 대해 세심한 배려가 있었다. 또한 당시의 신문은 국가와 민족의 앞날에 대한 책임감과 애국심도 깊었으며, 꾸준히 계몽의식을 고취시켜 시민의 의식 수준을 높이고 독립정신을 일깨웠다. 이러한 신문의 시대적 역할이 청년들에게 각인돼 일제치하에서도 민족의 자존심을 지키고 독립정신을 굳건히 해 나라를 찾는 원동력이 됐다.

어떻게 찾은 나라인가. 이 혼란스러운 시기에 언론이 중심을 잡아 역할을 충실히 수행해 희망의 새해를 맞이하기를 기대해본다.

이배용 전 이화여대 총장·영산대 석좌교수

[ⓒ 세계일보 & Segye.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피니언

포토

비웨이브 아인 '미소 천사'
  • 비웨이브 아인 '미소 천사'
  • 비웨이브 제나 '깜찍하게'
  • 정은지 '해맑은 미소'
  • 에스파 카리나 '여신 미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