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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병주의역사의창] 기근과 추위 극복의 일등공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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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7-12-07 20:57:30 수정 : 2017-12-07 20:5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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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마, 조선 영조 때 조엄이 日서 들여와 / 감자는 청나라 사람·英 선교사 의해 유입
차가운 바람이 부는 겨울 따뜻한 아랫목에서 가족과 함께 먹던 고구마와 감자는 겨울이면 더욱 생각나는 식품이다. 고구마와 감자를 먹다 까맣게 변한 손으로 코를 어루만지며 가족들과 겨울밤 이야기를 나누던 기억도 있을 것이다.

이제는 간식으로 주로 먹지만 고구마와 감자는 조선 후기 일본과 청나라에서 도입돼 기근에 시달리던 사람들의 생존을 책임졌던 고마운 식품이었다. 고구마는 17세기 중엽부터 통신사나 조선에 표류한 왜인 등을 통해 그 존재가 점차 알려졌는데, 1763년(영조 39) 일본에 통신사로 다녀온 조엄이 고구마 종자를 들여와 동래와 제주도에서 시험재배에 성공하면서 제주도와 남해안 지역에서 경작되기 시작했다.

‘정조실록’(1794년 12월 25일)에는 호남 위유사(慰諭使)로 나간 서영보가 고구마에 대해 정조에게 보고한 내용이 자세히 실려 있다. “조금 심어도 수확이 많고, 농사에 지장을 주지 않으며, 가뭄이나 황충에도 재해를 입지 않고, 달고 맛있기가 오곡과 같으며, 힘을 들이는 만큼 보람이 있으므로 풍년이든 흉년이든 간에 이롭다”고 한 후 “이 곡물은 우리나라가 종자를 얻은 것도 일본에서였으니, 이것의 성질이 남방의 따뜻한 지역에 알맞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라고 기록해 고구마가 주로 남쪽지방에서 잘 자랐음을 언급하고 있다. 또한 “국가로서는 마땅히 백성들에게 주어 심기를 권장하고 풍속을 이루게끔 해서 온 나라 사람들이 모두 좋은 혜택을 받기를 문익점이 가져온 목화씨처럼 해야 할 것입니다”라고 하여 고구마의 보급을 고려말 문익점이 목화씨를 보급한 것처럼 해야 한다고 주장한 내용이 주목을 끈다.

박제가의 ‘북학의’에는 고구마가 뚝섬, 한강의 밤섬 등지에까지 경작됐음을 기록한 내용도 보인다. 고구마의 전래와 더불어 그것에 관련된 서적들도 많이 나왔다. 1766년(영조 42) 강필리가 저술한 ‘감저보’는 고구마 전문서적으로는 최초이며, 1813년에는 김장순과 선종한이 ‘감저신보(甘藷新譜)’를 지었다. 1834년 서유구는 ‘종저보(種藷譜)’에서 일본과 중국의 서적까지 참조해 고구마 재배법을 소개했다.

먹거리 쪽에서 고구마의 최대 라이벌이라 할 수 있는 감자는 북저(北藷) 또는 토감저(土甘藷)라 불렸다. 감자의 유입에 대해서는 북방유입설과 남방전래설이 있다. 19세기 학자 이규경이 쓴 ‘오주연문장전산고’에 의하면 감자는 1824년경 국경인 두만강을 넘어 들어왔다고 한다. 인삼을 캐려고 국경을 넘어온 청나라 사람들이 밭이랑 사이에 감자를 남겨 놓고 갔다는 것이다. 김창한의 ‘원저보’에는 영국 선교사에 의해 감자가 전래됐음을 제시하고 있다. 1832년 영국 상선이 전라북도 해안에서 약 1개월간 머물렀는데, 그때 선교사가 감자를 나누어주고 재배법도 가르쳐 주었다는 것이다.

감자는 고구마보다 더 전국으로 퍼지게 됐고, 특히 원주, 철원 등 강원도 지역에서는 흉년에 기아를 면하는 작물로 각광을 받았다. 고구마와 감자는 조선 후기에 도입된 외래작물이지만 당시 기아 극복에 중요한 역할을 했고, 지금도 우리의 식탁을 풍요롭게 하고 있다. 올겨울에도 고구마, 감자와의 따끈한 추억을 만들어 보시기를.

신병주 건국대 교수·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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