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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인
원은희
동창회 다녀온 후, 또 한 사람의 연락처를 지운다. 졸업 후 몇 번 만난 적 있지만 오랫동안 연락 끊긴 친구의 부음에 다들 어깨 떨어뜨렸는데 이제는 소식조차 전할 수 없는 번호들 화이트로 지우니 계단이 되었다.

파산 후, 끝내 술로 넘어졌다는 이름, 몇 번의 대수술 이기지 못하고 떠났다는 이름, 이름으로 사는 게 버거운 날에는 나와 같은 상념에 젖었을 것이다.

지운 학번 중 얼굴 떠오른 여자, 번번이 번호 헝클어진 과제물을 내 순번 위에 가지런히 올려놓았던, 앞 번호의 그녀가 계단을 묶어놓고 시간으로 사라졌다 내용물은 남기고 제조일자 지운 흔적처럼.

뿌리내리고 살다가 사라진 풀처럼 밟고 지나가면 전생이 되는 것, 층층 올라가는 사람, 층층층 내려오는 사람.

모든 존재는 생겨남과 동시에 소멸의 과정을 밟는다.

우리 인간도 예외는 아니다.

시인은 동창회를 다녀온 후, 동창회 수첩에 적혀 있던 한 친구의 연락처를 지운다.

동창회 수첩에는 중간중간 화이트로 지운 이름들이 계단처럼 나 있을 정도로 많아졌다.

지운 이름 중에는 파산하여 술로 건강을 잃고 먼저 떠나간 이도 있고, 대수술 끝에 살아나지 못하고 돌아간 친구도 있다. 또한, 이번 낚싯배의 충돌사고처럼 전혀 예기치 못한 사고로 사라진 친구도 있다.

시인은 자기 앞번호 친구를 떠올린다. 늘 헝클어진 과제물을 시인의 과제물 위에 올려놓았던 그녀. 그 기억만을 남겨놓고 제조 일자 지운 흔적처럼 그녀는 사라졌다.

뿌리내리고 살다가 사라진 풀처럼 계단을 밟고 지나가면 전생이 된다.

어제, 작년, 십 년 전, 한 시간 또는 일 분 전에

층층 올라가는 사람,

층층층 내려오는 사람.

박미산 시인·서울디지털대 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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