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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병주의역사의창] 책에 빠진 정조와 이덕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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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7-11-23 21:12:26 수정 : 2017-11-23 21:1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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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 세손 시절부터 밤을 새워가며 독서 / 이덕무 ‘스스로 책에 미친 바보’라고 불러
늦가을 추위가 찾아오며 거리에는 낙엽이 쌓여 간다. 한 해를 마무리하는 시점에 마음에는 두었지만 이제껏 읽지 못한 책 한 권을 꼭 읽기를 권한다.

조선의 왕 중에서 최고의 성군으로 평가받는 세종과 정조 역시 방대한 책을 접했고, 이것은 창의적인 정책으로 이어졌다. 정조는 세손 시절부터 밤을 새워가면서 책을 읽었는데, 암살의 위협을 피하기 위한 방편의 하나라는 해석도 있다. 정조가 즉위 직후 왕실 도서관인 규장각을 세운 것도 왕과 신하가 먼저 책을 가까이 해야 한다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정조가 세손 시절부터 다양한 서적을 읽었음은 “내가 춘저(春邸·세자궁)에 있을 때 평소 책에 빠져 북경에서 고가(故家) 장서(藏書)를 사왔다는 소식이 있으면 문득 가져와 보라고 하여 다시 사서 보았다. (…)경사자집(經史子集)을 갖추지 않는 것이 없는데, 이 책들은 내가 다 보았다”는 ‘홍재전서’의 기록에도 보인다. 정조가 틈틈이 기록한 비망기 형식의 글인 ‘일득록(日得錄)’에도 “나는 어려서부터 책을 읽을 때마다 반드시 과정을 정해 놓았다. 병이 났을 때를 제외하고는 과정을 채우지 못하면 그만두지 않았다. 왕이 된 후로 폐기하지 않았다”거나, “눈 내리는 밤에 글을 읽거나 맑은 새벽에 책을 펼칠 때 조금이라도 나태한 생각이 일어나면 문득 달빛 아래서 입김을 불며 언 손을 녹이는 선비가 떠올라 정신이 번쩍 뜨이지 않은 적이 없었다”는 글에서는 독서에 대한 정조의 열정이 확연히 드러나 있다.

정조 시대 규장각 검서관으로 활약하면서 편찬 사업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한 학자 이덕무(李德懋·1741~1793)는 스스로 ‘간서치(看書痴·책에 미친 바보)’라 할 정도로 늘 책을 곁에 두고 읽었고 이를 손수 적어 기억했다. 이덕무의 벗 박지원은 이덕무 사망 후에 쓴 행장에서 그에 대해 “늘 책을 볼 때면 그 책을 다 읽은 다음에 꼭 베끼곤 했다. 그리고 항상 작은 책을 소매 속에 넣고 다니면서 주막이나 배에서도 보았다. 그래서 집에서는 비록 책이 없었지만 책을 쌓아둔 것과 다름없었다. 평생 읽은 책이 거의 2만 권이 넘었고, 손수 베낀 문자가 또한 수백 권이 되었다”며 책을 너무나 사랑한 벗을 회고했다.

이덕무 스스로 쓴 ‘간서치전(看書痴傳)’에는 “목멱산(남산) 아래 어떤 어리석은 사람이 살았는데, 어눌(語訥)하여 말을 잘하지 못하였다. 성격이 졸렬하고 게을러 시무(時務)를 알지 못하고, 바둑이나 장기는 더욱 알지 못하였다.(…) 어렸을 때부터 21세가 되기까지 일찍이 하루도 고서(古書)를 손에서 놓은 적이 없었다. 그의 방은 매우 작았다. 그러나 동창, 남창, 서창이 있어 동쪽 서쪽으로 해를 따라 밝은 데에서 책을 보았다. 보지 못한 책을 보면 문득 기뻐서 웃으니, 집안사람들은 그의 웃음을 보면 기이한 책을 구한 것을 알았다”고 기록했다.

늘 겸손하게 처신하며 책을 통해 모든 것을 얻으면서 스스로 ‘바보’라 했던 이덕무. 그러나 그는 결코 바보가 아니었다. 그의 왕성한 독서력과 해박한 지식은 책을 좋아하던 왕 정조와 환상의 조합을 이루면서 정조 시대 학문과 문화의 중흥을 이룩하는 데 중요한 발판이 됐다.

신병주 건국대 교수·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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