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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태훈의 만리경] 유행가까지 나온 이수근· 공습경보 발령 이웅평 등 역대급 '귀순'

입력 : 2017-11-18 12:16:00 수정 : 2017-11-18 12:1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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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 2월 25일 전국민의 간을 떼었다 놓았던 공습경보 방송. 이웅평이 미그기를 몰고 남으로 귀순을 시도하는 것을 공습으로 착각해 빚어졌던 소동이었지만 방송에서 "실제 상황입니다. 공습경보"라는 말이 나온 것은 6·25전쟁이후 처음 있었던 만큼 공포는 어마어마했다. 사진=국방부 홍보 블로그

[박태훈의 만리경] 한반도를 들었다 놨다 했던 역대급 귀순

▲ "새까만 안경에 이수근, 가짜머리 가짜수염 달고서, 홍콩 가는 비행기 탔다가 신나게  꼬리 잡혔네"

최근 쏟아지는 총탄을 무릅쓰고 판문점 JSA(공동경비구역)을 통해 귀순한 북한병사 사건이 큰 관심을 모으고 있다.

이와 가장 유사한 귀순 사례이자 국제적 뉴스거리가 된 것은 1967년 3월 22일 오후 5시무렵 일어났던 북한 중앙통신 부사장 이수근의 귀순이다.

남북군사정전위원회 대표의 차량에 올라 타  판문점을 빠져 나온 이수근(가운데) 조선중앙통신 부사장.

당일 판문점에서 열렸던 남북군사정전위원회 취재를 나왔던 이수근은 회의가 끝나자 잽싸게 UN군 대표였던 밴 크러프트 장군 승용차에 올라탔다. 북한 경비병들은 40여 발을 쏘면서 저지에 나섰지만 소용 없었다.

북한과 치열한 사상전과 함께 '누가 더 편하게 잘 사느냐'를 놓고 홍보전을 펼쳤던 정부는 물만난 고기처럼 대대적으로 환영행사, 초특급 대우 등을 하며 알리기에 바빴다.

출신성분이 뛰어난 북한 통신사 부사장 이수근이 귀순하자 정부는 절호의 홍보기회를 잡았다면 대대적인 국민환영행사를 열었다. 환영행사  때 당시 최고 스타 최은희(왼쪽)씨가 이수근에게 꽃다발을 건넨 뒤 악수를 하고 있다.

이수근은 대학교수와 결혼, 중앙정보부 특채 등 남부럽지 않은 삶을 사는 듯 했지만 이듬해인 1969년 1월 27일 처조카 배경옥(당시 29세)과 함께 태국을 향해 떠났다.

김포에서 도쿄, 타이베이를 경유하는 홍콩행 CPA기에 탑승한 그는 홍콩 험프리 호텔에서 이틀 체류했다. 이후 태국이 아닌 캄보디아로 행선지를 변경, 프놈펜행 CPA기를 타려고 1월 30일 홍콩 공항에 나타났다.

한국영사관 직원들이 공항에 나와 이수근 체포를 시도하자 홍콩 경찰은 모두 연행했다.

영사관 직원들은 외교관 면책특권에 따라 즉시 석방됐고 이수근과 배씨는 억류되었다.

이씨는 '정치적 망명'을 주장, 홍콩당국의 출국 허가를 받는데 성공했다. 이수근은 1월 31일 캄보디아 프놈펜으로 가기 위해 CPA기에 올랐다. 

제3국으로 가기 위해 홍콩을 거쳐 베트남까지 갔던 이수근씨는 요원들에게 체포돼 서울로 압송됐다.

이씨 일행이 경유지인 베트남 탄손누트 공항에 도착, 기내에서 대기하던 중 당시 주월대사관 이대용 공사 등이 기내에 들어가 체포, 대사관에 잠시 억류한 뒤 이날 밤 공군기에 태워 한국으로 압송했다.(이대용 공사는 월남 마지막 한국공사로 월남패망 때 잡혔다. 고문과 전향유혹을 버텨낸 그는 5년만에 풀려났으며 지난 14일 향년 92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귀순과 해외도피, 추격전 등 영화와 같았던 이수근 사건은 당시 남진이 불러 유행시킨 노래 '마음이 고와야지'의 "마음이 고와야 여자지, 얼굴만 예쁘다고 여자냐"라는 가사를 "새까만 안경에 이수근, 가짜머리 가짜수염 달고서, 홍콩가는 비행기에 탔다가 신나게 꼬리 잡혔네"라고 바꾼 노랫말이 꼬마들 사이에 널리 퍼질 정도로 엄청난 관심을 모았다.  

그 해 5월 이수근에게 국가보안법과 반공법 위반으로 사형 선고가 떨어졌고 7월 3일 형이 집행됐다.

그가 유명을 달리한 지 38년이 지난 2007년 1월 15일 진실과 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위원장 송기인, 아래 진실화해위원회)는 "이수근 간첩 조작의혹사건에 대해 진실규명 결정을 내렸다"며 "중앙정보부(중정)는 이수근을 위장간첩으로 조작해 처형했다"고 억울하게 죽었음을 공식 발표했다.

진실화해위원회는 이수근이 우리 정보당국의 철저한 감시에 숨막혀 제 3국에서 살기 위해 망명을 시도한 것으로 판단했다.

이와 별도로 사형집행 39년만인 2008년 12월 19일 서울고등법원은 재심을 통해 무죄를 선고했다.

이수근의 탈출을 도운 죄로 무기징역을 선고 받고 21년간 억울한 옥살이를 한 뒤 1989년 12월 석방된 이수근의 처조카 배경옥도 무죄를 선고 받았다.

▲ "실제 상황입니다, 서울, 인천, 경기지역에 경계경보 발령"…휴전후 처음 공습경보 발령됐던 이웅평 미그-19 귀순  

이웅평 대위는 전군에 비상을 걸게 만들면서 죽음의 탈출을 감행, 수원 비행장에 미그19기를 착륙시켰다.  수원 비행장 경계요원들이 미그 19기 주위를 철통같이 지키고 있다. 사진=국방부 홍보 블로그 

1983년 2월 25일 있었던 이웅평 북한 공군대위의 귀순은 국민들 가슴을 철렁 내려앉게 한 일로 유명하다.

북한 주력 전투기인 미그-19를 몰 만큼 엘리트 군인이었던 이웅평 대위는 당시 한미 연합 팀스프릿 훈련에 맞서 북한군이 대대적인 전시대비 훈련을 펼치는 틈을 이용해 훈련편대 비행에서 빠져 나와 남쪽으로 기수를 돌렸다.

북한 전투기가 남으로 내려오는 모습이 레이더에 잡히자 우리 군엔 비상이 걸렸고 전투기가 출격했다.

정확한 사정을 몰랐던 까닭에 민방위 경보체제가 발동, "여기는 민방위 본부입니다. 지금 서울, 인천, 경기지역에 경계경보를 발령합니다. 이 것은 실제 상황입니다. 다시 알립니다. 실제 상황입니다"라는 날벼락보다 더 무서운 경보방송이 TV, 라디오를 통해 전국에 전해졌다.

차를 타고 가던 사람들이 내려 하늘을 쳐다 보는 등 잠시 큰 혼란이 빚어졌다.

곧 이어 '북한 조종사의 귀순이다'는 안내방송이 나갔지만 전쟁의 공포와 무서움을 알고 있었던 우리 국민들이었기에 "실제 상황입니다"라는 말이 던진 충격은 어마어마했다.

이웅평 대위는 이후 결혼도 하고 우리 공군에 복무, 대령까지 진급했다. 2002년 5월 4일 간경화가 악화 돼 별세했다.  

▲ '따뜻한 남쪽나라' 유행어 남긴 11명의 김만철 일가 탈북

부인과 자식은 물론이고 장모, 처남, 처제 등 11명의 김만철 가족이 1987년 2월 8일 김포공항에 도착하던 모습.  '따뜻한 남쪽나라'라는 말을 유행 시켰다.

1987년 2월 8일 김포공항은 취재진, 정보기관, 경찰 등의 인력으로 북새통을 이뤘다.

부인과 자식, 68세 된 장남, 처남, 처제 등 무려 10명의 가족을 이끌고 탈북을 감행한 김만철씨가 일본을 거쳐 우리땅을 밝았기 때문이다.

북한 청진의과대병원 의사였던 김만철씨는 그해 1월 15일 새벽 1시 50톤짜리 청진호를 훔쳐 가족을 배에 태우고 북한 탈출을 감행했다.

하지만 엔진고장으로 표류하다가 20일 일본 후쿠이헝에 도착, "따뜻한 남쪽 나라고 가고 싶다"고 했다.

당시 김만철씨가 말했던 '따뜻한 남쪽 나라'는 한국이 아니라 남쪽의 파라다이스였다. 훗날 김만철씨는 "한국은 병마의 소굴이고 거지들이 득실 거린다는 교육을 수없이 받아 왔기에 한국으로 갈 생각은 꿈에도 없었다"고 했다.

김만철씨를 놓고 우리와 북한, 일본간 줄다리가 이어졌다.

조총련을 동원한 북한의 끈질긴 작전에도 불구하고 우리 정부는 김만철 일가와 일본정부를 설득, 제3국 경유를 통한 한국행을 성사시켰다.

일본 정부도 남도 북도 아닌 곳으로 보낸다면 한국과 북한 모두로부터 형식적으로나마 비난을 피할 수 있기에 받아 들였다.

김만철씨 일가는 2월 7일 새벽 오키나와→대만 타이베이를 거쳐 다음날 김포로 왔다. 물론 이 과정서 우리정부는 모든 정보역량과 철저한 경호책을 펼쳤다.

대가족의 북한 탈출은 당연히 국제적 이슈거리가 됐다.

▲ 주체철학의 대가 황장엽 망명, 분단 후 최고위급 귀순인사

 한국, 북한, 중국간 두달이 넘는 치열한 다툼끝에 마침내 한국땅을 밟은 황장엽(왼쪽) 노동당 비서와 김덕홍 노동당 상무위원이 만세를 부르고 있다.

우여곡절끝에 1997년 4월 20일 한국땅을 밟은 황장엽(1923년 2월 27일~2010년 10월 10일) 전 북한 노동당 비서는 지금까지 한국을 찾아온 북한 주민 중 최고위층 인사였다.

김일성 대학 총장, 노동당 중앙위원, 최고인민회의 의장, 노동당 비서, 주체사상연구소장, 조평통 부위원장 등 권력서열 13위까지 오른 인물이다.

주체사상 최고 이론가로 외국에 이를 소개하고 외국 학자들을 설득하는 일을 맡아 왔다.

이런 황장엽 비서가 한국에 망명한 사건은 북한 정권에 엄청난 타격을 안겼다. 권력서열보다 주체사상 최고 이론가가 북한 정권을 버렸다는 사실에 모두들 놀라워했다.

황장엽 비서는 김정일의 지시로 북일수교 문제 등을 논의하기 위해 1997년 1월 30일 일본을 찾았다.

당시 황 비서는 노동당내 입지가 상당히 좁아진 상태였으며 노동신문은 그에 대해 공공연한 비판을 쏟아냈다.

이런 상태서 일본을 찾았던 황 비서는 아무런 성과를 거두지 못하자 2월12일 귀국을 위해 도쿄에서 중국 베이징으로 간 틈을 이용해 우리 총영사관 문을 두들겼다.

거물의 망명신청에 우리정부도 크게 놀라 모든 기관을 동원, 황장엽 보호에 나섰다.

북한도 '한국이 납치했다'며 강력 반발, 중국을 통해 사태를 되돌리려 하고 극단적 방법까지 생각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했다.

남과 북, 중국, 미국 등 관련국들이 치열한 수싸움끝에 그해 4월 20일 황장엽은 측근 김덕홍(노동당 정치국 상무위원)과 함께 한국땅을 밟으면서 '만세'를 외쳤다.

황 비서는 국빈급 경호속에 지내다가 2010년 10월 사망했다.

▲ '나 여기 있소' 엽기 귀순도…노크, 숙박 귀순 

북한에서 남쪽으로 귀순한 사례 중 웃지 못할 것들도 있다. 이른바 '노크 귀순' '숙박 귀순'이 그 것이다 

노크귀순은 2012년 10월2일 밤 북한군 병사 1명이 육군 22 사단 GOP(민간인 통제구역) 창문을 두드리고 귀순한 사건을 말한다.

북한군 병사는 10월 2일 밤 11시쯤 군사분계선 철책을 넘어선 뒤 우리 경비대 문을 두들겼다.

아무런 응답이 없자 다시 이동해 초소막사 유리문을 노크 '나 왔소'라는 사실을 알렸다.

노크 귀순 사건은 우리 군 경계 문제와 함께 '노크귀순'이라는 분대장 보고가 'CCTV'로 확인이라고 상부에 잘못된 보고가 올라간 문제까지 터져 나왔다.

결국 국방부 장관이 사과하고 사단장, 연대장, 대대장 직위해제, 1군 사령관 및 8군단장 '장관 엄중 경고' 등 휘오리 바람이 불었다.

'숙박 귀순'은 2015년 6월14일 군사 분계선을 넘은 북한군 하전사가 (가장 낮은 계급)가 남쪽 방향으로 500m 떨어진 우리 군 15사단 GP인근에서 잠을 잔 뒤 다음 날 아침 우리 군 철책으로 내려와 역시 '나 여기 있소'라고 외친 일을 말한다.

귀순 북한병사는 함경남도 함흥에 있는 북한군 7군단 예하 여단의 보위부장(상좌=우리의 대령) 운전병으로 밝혀졌다.

박태훈 기자 buckbak@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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