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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체사상 왜곡·변질되자 망명
‘사람중심철학’으로 용어 변경
북한 이념·구호·노선 답습 우려
우리 안보관에 부합하는지 의문
“북한은 준전시 상태로 진입해서 전쟁이 일촉즉발 터질 상태였어요. 그래서 남쪽으로 내려가 전쟁의 위험을 경고하자는 생각이었습니다.” 1983년 2월 25일 북한군 주력기 미그-19기를 몰고 서해상으로 망명한 이웅평 상위(대위)가 라면 봉지에 적힌 ‘유통 과정에서 훼손·변질된 제품은 교환해준다’는 안내문을 읽고 작은 물건 하나까지 인민의 편의를 제공하는 남한 사회를 동경했다는 이유와 함께 밝힌 귀순 동기다. 당시 한국군은 미군과 함께 팀스피리트 훈련 중이었다.

그러나 수백만 명이 굶어 죽고 탈북 행렬이 줄을 잇던 고난의 행군 시기인 1997년 2월 12일 단행한 황장엽 북한 노동당 비서의 망명 동기는 어딘지 석연찮았다. 남침은커녕 체제 유지도 어렵던 때였다. “그 어느 때보다 전쟁 도발 위험이 고조되고 있어 남한 당국과 협력해 전쟁을 막고 평화통일 실현에 다소나마 기여하기 위해 망명을 결심하게 됐다.” 북한 외교부는 처음엔 “상상할 수도 없는 일” “납치된 것”이라고 발끈하더니 닷새 만에 “변절자여 갈 테면 가라”는 성명을 발표했다.

조정진 논설위원 겸 통일연구위원
망명한 황장엽은 김대중정부 때 미국 방문이 좌절될 정도로 정권의 감시를 받았지만 회고록 ‘나는 역사의 진리를 보았다’와 ‘어둠의 편이 된 햇볕은 어둠을 밝힐 수 없다’ 등 10여권의 책을 집필했다. 그가 남한에 와서 펴낸 저서 중에는 ‘인간중심철학’ 3부작(세계관, 사회역사관, 인생관)과 함께 ‘인간중심철학 원론’, ‘인간중심철학의 몇 가지 문제’도 있다. 자신이 기초한 북한의 지도이념인 주체사상을 인간중심철학이란 이름으로 변형해 펴낸 책이다.

황장엽의 인간중심철학 해설서들은 전국의 서점과 공공도서관에서 손쉽게 구해볼 수 있다. 1980년대 운동권 대학생들이 구속을 각오하고 몰래 보던 이념 서적이 버젓이 양지로 나온 셈이다. 심지어 남한에서 그의 지도를 받은 제자들은 인간중심철학연구회를 창립해 연구 활동까지 벌였다. 거물 남파 간첩 이선실의 정체를 모르고 몇 번 접촉했었다는 장기표 신문명정책연구원장이 황장엽의 귀순 동기를 의심하는 것은 이런 이유다.

고인이 된 황장엽을 다시 거명한 것은 최근 대통령 비서실 국정감사에서 자유한국당 전희경 의원과 임종석 청와대 비서실장 사이에 불거진 논란 때문이다. 전 의원은 ‘주사파와 전대협이 장악한 청와대’라 칭했고, 전대협 3기 의장 출신인 임 실장은 즉답을 피한 채 “매우 모욕감을 느끼고 강력한 유감의 뜻을 표한다”고 했다. 전대협은 ‘반제민족해방과 민중민주주의(NL)’라는 북한의 정치노선과 지도 이념인 주체사상을 신봉하는 주사파 간부들이 핵심 주도세력을 이루고 있었다. 전대협 산하 조국통일위원회는 이적단체로 규정되기까지 했다.

전 의원의 질의는 적잖은 국민이 갖고 있는 의구심이다. 연일 북한의 핵·미사일 위협과 전쟁설에 시달리는 분단국가의 국회의원으로서 그 어느 때보다 한·미동맹과 한·미공조가 시급한 엄중한 시기에 주한미군 철수, 국가보안법 철폐, 평화협정 체결, 연방제 통일 등 북한의 대남적화 노선에 동조한 단체의 수장 출신 고위 공직자를 검증하는 질문이었다. 청와대 비서실은 인사청문회도 거치지 않는다.

박근혜 대통령 탄핵 정국에서 급히 실시된 19대 대통령 선거에서 문재인 후보는 자신의 책 이름이기도 한 ‘사람이 먼저다’라는 구호를 내걸고 당선됐다. 지난주 베트남에서 열린 에이펙(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 정상회의에서는 ‘우리 정부는 사람 중심 경제를 지향한다’고 했다. 너무 당연한 말을 하니 외려 놀랍다.

북한의 문학예술사전은 주체사상을 ‘인간 중심의 새로운 철학사상’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황장엽이 망명 후 사용한 인간중심철학이란 용어와 똑같다. 우연의 일치라 하기에는 찜찜하다. 북한과 군사적으로 대치하는 대한민국 대통령이 굳이 김일성 주체사상의 핵심 구호와 유사한 ‘사람 우선’ ‘사람 중심’을 통치철학으로 내세우는 것이 과연 바람직한지 곰곰 생각해볼 일이다.

조정진 논설위원 겸 통일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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